[뉴시안= 최정엽 편집국장]탄소의 연결고리 집합체인 석유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생산-유통-소비' 구조는 복잡하다. 어느 누구도 가격을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환율, 전쟁 등 지정학적 불안 요인뿐만 아니라 정기 보수, 설비 트러블, 신증설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등락을 거듭한다. 경제 전문가들이 아침에 꼭 확인하는 3가지 중 하나가 국제유가(환율, 반도체 가격)다. 모든 산업이 석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 한 방울의 석유에서 나오는 제품은 수천여 가지다. 단순 비닐, 플라스틱을 넘어 폴리에스터 섬유, 전기·전자·자동차·스마트폰·배터리 등 첨단 산업 소재, 비타민, 셀룰로스 등 각종 의약품 제조 원료 등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석유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은 현재 기술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나나 생산 후 포장할 비닐봉지가 없어 자칫 식탁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일본 언론의 기사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한화토탈에너지스가 고객사에 불가항력을 통보한 PX(파라자일렌)의 경우 대부분 중국 등 수출용이다. 한화토탈의 경우 국내 석유화학사와 달리 하루 18만 배럴 규모의 정제 설비를 직접 운영하는 독특한 구조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사실상 정유사다. 가스층이 압력을 받아 액화된 물질을 컨덴세이트라 하는데, 이를 수입, 정제 과정을 거쳐 경질 나프타와 중질 나프타, 그리고 일부 휘발유 등 석유 제품을 생산한다. 경질 나프타는 NCC(나프타 크래커)에서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등 탄소 연결고리가 비교적 작은(2~4개) 올레핀 제품 생산에 활용되며, 중질 나프타의 경우 벤젠, 톨루엔, 자일렌, 파라자일렌(PX) 등 탄소 연결 고리가 5개 이상인 아로마틱 제품 생산으로 이어진다. 나프타에서 이어지는 연결 고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전 생애 주기를 함께한다.
결국 중동전쟁으로 시작된 고유가 상황은 단순하게 휘발유, 경유 등 수송용 연료와 난방용 등유 가격 급등이 문제가 아니라, 석유에서 파생되는 모든 소재와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사재기는 주유소가 아닌 소비자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평소 5~6만 원 수준의 주유 패턴을 가졌던 운전자들이 일단 가득 채우고 다니는 패턴으로 변했다.
실제 정부가 공개한 한국석유관리원 석유제품 판매량 추이를 보면, 전쟁 발발 후 석유 제품값 상승 영향으로 3월 2주 판매량은 전주 대비 휘발유 14%, 경유 5% 줄어들었다. 가격이 오르니 소비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정부의 헛발질로 수요는 급증한다. 3월 13일 정부가 30년 만에 부활시킨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3월 3주는 3월 2주 대비 휘발유 8%, 경유 2% 오히려 늘었다. 정부의 지속적인 가격 통제 속에서 3월 4주에는 3월 2주 대비 휘발유 25%, 경유 16% 폭증한다. 3월 4주 판매량의 경우 전쟁이 없었던 전년 동기 대비로도 휘발유와 경유는 각각 15%, 4% 늘어난다. 소비 증가 패턴은 정부의 2차 최고가격 조정으로 210원 인상한 후 4월 1주에야 판매량이 줄어든다.
결국 전쟁 이후 정부 시장 개입으로 인위적인 가격 인하가 없었다면, 석유 제품 소비는 전년 대비 20~30% 줄어 여유 재고가 늘어나는 효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격을 시장에 맡겨 수요의 자연 감소를 유도하고, 정말 어려운 생계형 소비나 산업용 소비에 특화 지원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다. 국가가 앞장서 기름 낭비를 부추긴 꼴이다. 이미 에쓰-오일(S-OIL)과 현대오일뱅크가 정기 보수 일정이 4~5월에 잡혀 전쟁이 없었어도 생산량이 줄어들 예정인데도, 6월 지선을 앞두고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정치권이 가격 인하라는 포퓰리즘에 매몰된 대표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보도에 신중을 기하라'는 식의 보도설명자료로 언론을 압박하고 나선 가운데, 그 근거로 제시한 정부의 엉터리 데이터가 오히려 언론 보도 내용의 신뢰도를 높이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이어졌다. 대체 정부가 국민 생활에 민감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산업에 대한 기본 이해나 부처 간 정보 공유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정부는 한 장짜리 보도설명자료를 통해 "판매량이 낮았던 주와 높았던 주를 임의로 특정, 단순 비교해 사실관계 파악에 제한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판매량이 낮았던 주는 전쟁 발발 다음 주 석유 제품 가격이 오르면서 소비가 자연스럽게 감소한 시기며, 판매량이 높았던 주는 최고가격제 도입에 따른 시장 왜곡으로 소비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사실상 두 시기를 비교하면 정부 도입 최고가 제도가 수요 흐름의 역행을 야기해 '수급 위기'를 초래했음을 보여주는 정확한 비교 자료 역할을 한 셈이다.
석유 산업의 정부 최고 책임자인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름값을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석유 최고가격 제도가 오히려 시장경제에 역행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이른 시일 내 종료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비쳤다. 스스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청와대와 정부가 앞장서 확보했다는 UAE 2400만 배럴과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등 2억7200만 배럴 물량 역시 정유사의 원유 트레이딩 과정을 보면 맹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본적으로 원유 도입에 사용되는 선박의 경우 대개 200만 배럴 규모 VLCC로, 최소 2~3군데, 많게는 7~8곳을 돌아 받아오는 구조다. 게다가 200만 배럴을 쉬지 않고 담아도 최소 2~3일이 걸린다. 정부가 나서 새로운 물량을 확보했더라도 기존에 계약된 물량의 반출이 우선인 만큼 사실상 대규모 선박의 항만 새치기는 불가능하다. UAE 물량의 경우 SK에너지와 GS칼텍스, 그리고 비축분 각각 200만 배럴씩 총 600만 배럴이 기존 물량이었고, 나머지 1800만 배럴은 언제 들여온다는 정보는 전혀 없으며, 정유업계 관계자들도 노코멘트다. 사우디 등 2차 물량 역시 대부분 기존 계약 물량이 차지한다. 비산유국 대한민국을 위한 산유국은 없다.
김 장관의 발언처럼 '가격 개입'은 어디까지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고유가 첫 대책으로 내놓으며 첫 단추를 잘못 끼워버렸다. 최고급 세단을 타고 다니는 국민과 생계형 소형 트럭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국민 모두 똑같이 받은 혜택으로 정부가 정유업계에 물어줘야 할 비용은 최소 4조5000억 원으로 전해진다. 석유 최고가 제도가 유지되는 한 이 비용은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중동전쟁으로 국제유가가 폭등하자 정유사와 주유소의 가격 인상을 압박하기 위해 이미 30여 년 전 사라진 '석유 최고가' 제도를 부활, 급한 불 끄기에 나섰던 정부의 정책은 잔불을 키워 확산하고 있다. 이 잔불들의 역습은 뻔하다. 석유에서 파생되는 모든 산업과 제품 가격 인상 파도 앞에 국민을 세워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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