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특파원 리포트] 메모리 호황 속 ‘칩4 동맹’의 퇴조

이런 지형 변화의 핵심에는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가 있다. AI 반도체가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파운드리 1위 TSMC의 지위는 범접 불가 수준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설계·제조를 포함하는 전천후 반도체 강국을...

[특파원 리포트] 메모리 호황 속 ‘칩4 동맹’의 퇴조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애리조나 주 청사 내 행사장에서 미국 애리조나 주, 대만 가오슝시, 일본 구마모토현이 3자 MOU를 체결하고 있다. 왼쪽부터 다케우치 신기 구마모토현 부지사, 케이티 홉스 애리조나 주지사, 산드라 왓슨 애리조나 상무국 대표, 천치마이 가오슝 시장, 뤄다성 가오슝 부시장. 스크린 화면의 인물은 온라인 참석한 기무라 다카시 구마모토현 지사. /애리조나 상무부

대만 가오슝, 미국 애리조나, 일본 구마모토 등 세 도시가 지난 17일 3자 간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대만이 ‘반도체 가치 동맹’을 매개로 미국·일본과 밀착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핵심 거점 지방정부들까지 전면에 나서 공식적인 연대를 천명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한국 입장에서는 뒷맛이 씁쓸하다.

불과 3~4년 전 미국 주도로 한국·미국·일본·대만을 묶는 이른바 ‘칩4(Chip 4) 동맹’ 구상이 제기됐을 때만 해도, 한국의 참여 여부는 이 글로벌 동맹 형성에 핵심 변수였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오면서 칩4 동맹이라는 구호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미·일·대만의 반도체 3각 연대에 밀려 한국은 점점 주변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지형 변화의 핵심에는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가 있다. AI 반도체가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파운드리 1위 TSMC의 지위는 범접 불가 수준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설계·제조를 포함하는 전천후 반도체 강국을 꿈꾸던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만 담당하는 역할로 위상이 축소됐다. 더구나 현재 3각 동맹의 핵심으로 부상한 대만은 산업 경쟁자이자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을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미·일·대만 중심의 굳건한 AI 반도체 생태계에 메모리를 납품하는 공급처 정도로 한국을 묶어두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일지 모른다.

한국만 ‘메모리 섬’으로 소외되는 현실은 최근의 메모리 품귀 현상에 따른 호황과 증시 랠리로 인해 철저히 가려져 있다. 젠슨 황, 리사 수 등 세계적인 AI 리더들이 메모리 확보를 위해 앞다퉈 한국을 찾자, 우리가 대체 불가능한 국가가 된 것 같은 착시가 생겼다. 이 달콤한 호황이 영원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과제는, 어렵게 확보한 메모리 시장의 우월적 지위를 지렛대 삼아 글로벌 ‘반도체 가치 동맹’의 중심축으로 파고들어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때그때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움직이는 얄팍한 ‘물리적 결합’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공유하는 ‘화학적 동맹’을 구축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TSMC와 대만 정부는 압도적 우위를 무기 삼아 미국과 일본 등 동맹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견고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물론 대만이 겪는 지정학적 위기 상황과 한국의 현실은 달라서 직접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이 원팀으로 움직이며 글로벌 협력을 주도하는 자세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치권의 시야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역 균형 발전 명목으로 쪼개자는 소모적 정쟁에 갇혀 있다. 일시적 호황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글로벌 패권 경쟁이라는 장기전의 큰 그림은커녕,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