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조달러 자본시장이 온체인으로 간다...한국은 준비됐나
네이버·카카오·하나금융, '포스트 코인베이스'를 향한 레이스
스테이블코인부터 RWA까지...한국 테크의 마지막 성장 퍼즐
한국의 테크 기업들은 AI라는 거대한 변곡점 앞에서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반도체와 클라우드, 플랫폼과 데이터, 에너지와 지정학이 복잡하게 얽힌 시대 속에서 이들은 어떠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음 고비를 넘어설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다. 테크M은 창간 6주년을 맞아 한국적 정서를 담은 기획 시리즈 '테크 아리랑' 6편을 게재한다. 이를 통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격랑 속에서 국내 테크 기업들이 지닌 강점과 한계를 짚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해 나가는 여정을 따라가본다. <편집자주>
지난해 11월 네이버 1784에서 진행된 네이버-네이버파이낸셜-두나무 3사 공동 기자간담회에서 3사 경영진들이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박상진 Npay 대표, 최수연 네이버 대표이사,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송치형 두나무 회장, 오경석 두나무 대표이사 /사진=네이버
코드 몇 줄이 은행 창구를 대체하고, 스마트컨트랙트가 복잡한 정산 절차를 순식간에 처리하는 세계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이 재편하는 신뢰와 거래의 질서 앞에서 한국은 준비가 돼 있는가. 글로벌 빅테크와 전통 금융이 디지털 자산 인프라를 선점하기 위해 속도를 올리는 지금, 한국 기업들에게 이 흐름은 위협인 동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돈의 문법을 바꾼다
변화의 진원지는 스테이블코인이다. 법정화폐에 가치를 고정한 이 디지털 자산은 투기의 영역을 벗어나 글로벌 결제 인프라의 핵심 레이어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은 현재 약 2500억달러에 달하며, USDT와 USDC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비자는 이더리움과 솔라나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정산 레일을 구축해 가맹점이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수납·정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스트라이프는 AI 에이전트 전용 결제 표준인 x402 기반의 '머신 페이먼트'를 공개하며 0.01달러짜리 초소액 거래까지 실시간 처리하는 구조를 시장에 내놨다.
기존 국제 송금은 SWIFT망을 거쳐 수일이 걸리고 수수료도 높았다. 스테이블코인 기반 정산은 이를 수 초로 줄인다. 나스닥이 올해 3분기 말 상장 주식과 ETF를 토큰 형태로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 출시를 목표로 하고, NYSE의 모회사 ICE가 블록체인 기반 주식 거래 플랫폼을 준비하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금융 시스템의 백엔드 자체가 블록체인으로 교체되는 과정이 이미 시작됐다.
이미지=챗GPT
코인베이스의 x402 프로토콜과 이더리움의 ERC-8004가 결합하면서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결제하고 신원을 증명하는 구조도 현실이 됐다. x402 기반 누적 트랜잭션은 이미 1억6000만건을 돌파했다. AI 에이전트가 국경도 시간도 없이 경제 활동을 수행하는 세계에서 블록체인은 그 에이전트의 신분증이자 화폐로 기능한다.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 자체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은 아시아 주요 시장 가운데 스테이블코인 전용 법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관할권이다. 디지털자산 기본법 2단계 입법이 핵심 쟁점을 해소하지 못한 채 해를 넘겼고, 당정협의회도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발목을 잡는 건 발행 주체를 둘러싼 기관 간 이견이다. 금융위원회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은행이 지분 50%+1주를 보유한 컨소시엄에 우선 허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한국은행의 통화 주권 우려를 반영한 결과다. 반면 국회 여당 디지털자산TF는 발행 주체를 상법상 일반 회사로 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은행 지분 과반 룰이 위헌 소지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자본금 요건을 어디까지 설정할지, 거래소의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유통 기능을 분리할지 여부도 여전히 논의 중이다.
제도 공백의 대가는 크다. 국내 규제 공백 속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자리 잡지 못한다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표준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규제 바깥에서는 이미 움직임이 시작됐다. 비댁스의 KRW1이 PoC 단계에서 기관 대상 인프라 시연을 진행 중이고, 네이버페이·업비트 컨소시엄과 카카오뱅크 등 대형 플레이어들은 법 제정과 동시에 발행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법이 열리는 순간 시장이 동시에 열리는' 독특한 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 시장은 이미 출발선 앞에 섰다. 제도만 신호탄을 쏘지 못하고 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사진=네이버
네이버 '포스트 코인베이스'를 향한 포석...웹3 포털 꿈꾸는 카카오
한국 플랫폼 기업 중 가장 공격적으로 이 흐름에 올라탄 곳은 네이버다. 네이버파이낸셜과 글로벌 3위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의 운영사 두나무의 포괄적 주식교환은 단순한 M&A가 아니다. 네이버의 광고·커머스·결제 생태계와 두나무의 블록체인 기술·1300만 가입자 기반을 결합해 코인베이스가 미국에서 만들어낸 심리스한 디지털 자산 생태계를 한국형으로 구현하겠다는 전략이다.
두나무가 지난해 9월 공개한 이더리움 기반 레이어2 체인 '기와(GIWA)'는 코인베이스의 베이스 체인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시 핵심 유통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네이버페이와 업비트는 이미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사업 협력을 공식화했다. 합병이 마무리되면 네이버의 스마트스토어 60만 판매자와 네이버페이 3000만 사용자가 온체인 경제의 첫 번째 유통망이 된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네이버페이의 3000만 사용자 기반과 두나무의 블록체인 기술을 결합해 글로벌 혁신을 만들겠다"며 결제부터 가상자산 투자까지 아우르는 올인원 지갑 전략을 예고했다. 관련 주주총회 일정이 5월에서 8월 중순으로 밀린 것은 가상자산 2단계 법안 지연의 영향일 뿐, 거래 구조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
카카오는 발행보다 유통에 방점을 찍었다. 신원근 카카오페이 대표는 지난해 12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K금융 대전환' 심포지엄에서 "복잡한 정산 구조를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효용을 갖춰야 한다"며 스테이블코인을 투자 수단이 아닌 지급결제 인프라로 규정했다. 카카오의 무기는 카카오톡이다. 5000만명이 매일 여는 메신저를 스테이블코인 확산의 채널로 삼고, 카카오페이·카카오뱅크의 금융 인프라,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K팝·웹툰, 카카오게임즈의 게임 생태계를 단계적으로 연결해 디지털 자산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사진=카카오페이
법정화폐·스테이블코인·민간 코인을 모두 담는 '슈퍼 월렛'도 준비 중이다. 카카오페이는 국내외 120만개 온오프라인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어 스테이블코인 유통처로서의 경쟁력도 탁월하다. 카카오 계열사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공동TF를 꾸리고 관련 상표권을 잇따라 출원하며 제도화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업계에서는 위메이드가 위믹스 메인넷 '스테이블넷'을 구축해 블록체인 게임 생태계를 운영 중이고, 컴투스홀딩스는 메인넷 '엑스플라'를 통해 코인원 2대 주주로 생태계에 발을 걸쳤다.
금융권에서는 하나금융이 가장 공격적이다. 4대 금융지주 가운데 원화 스테이블코인 컨소시엄을 가장 먼저 꾸렸고, 두나무와 블록체인 기반 외화송금 기술검증(PoC)을 완료해 올해 3분기 실서비스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기존 SWIFT 방식으로 수일이 걸리던 하나은행 국내외 지점 간 송금을 두나무의 GIWA체인으로 대체해 처리 시간과 비용을 대폭 줄이는 데 성공했다. 하나카드는 스테이블코인 USDC 기반 외국인 결제 마케팅도 이미 시작했다. 디지털자산 인프라를 실험실에서 꺼내 현장에 먼저 심어두는 전략이다.
미래에셋증권은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을 인수하며 토큰증권(STO)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SI 기업으로는 LG CNS가 신한은행의 '프로젝트 한강' 2단계 핵심 파트너로 예금토큰 기반 결제 실증을 진행 중이다.
/ 사진=제미나이
준비됐는가, 한국은
문제는 속도다. 글로벌 자본 시장은 이미 토큰화 주식과 RWA 시장 개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BCG와 리플은 2030년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RWA 시장 규모를 9조4000억달러로 전망한다. 나스닥은 올해 3분기 말 토큰화 주식 플랫폼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고, 블랙록은 토큰화 펀드 BUIDL의 자산 규모를 빠르게 키우고 있다. 코인베이스는 토큰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사고 판다'를 선언하며 주식·채권·디지털 자산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거래하는 미래를 준비 중이다. 방향은 정해졌다. 속도의 문제만 남았다.
반면 한국은 제자리다. 디지털자산 2단계 법안 논의는 무기한 연기됐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기준조차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발행 주체를 둘러싼 금융위원회와 국회 간 이견, 한국은행의 통화 주권 우려가 입법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이 지니어스 액트로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확립하고, EU가 MiCA 프레임워크 아래 토큰화 자산의 제도권 편입을 완성해가는 동안 한국은 논의 단계에서 시간을 쓰고 있다.
업계의 우려는 구체적이다. 제도 공백이 장기화될수록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디지털 결제의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 원화 기반의 금융 주권을 디지털 경제에서 지키려면 제도가 먼저 틀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다. 역설적이게도 기업들은 이미 출발선에 서 있다. 네이버·카카오·하나금융·미래에셋 모두 법이 열리는 순간 동시에 치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기술과 자본은 준비됐다. 제도만 신호탄을 쏘지 못하고 있다.
코드가 돈의 흐름을 바꾸는 속도는 입법의 속도보다 빠르다. 인터넷 혁명 때 플랫폼에 주도권을 내준 전통 금융의 실수를 디지털 자산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 글로벌 인프라 선점 경쟁이 벌어지는 지금, 한국 기업들이 만들어가는 디지털 자산 실험의 성패는 결국 제도와 기업의 속도가 얼마나 맞물리느냐에 달려 있다.
이수호 기자 lsh5998688@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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