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즈포럼
노지영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선임전문관
1962년 1월 15일, 그리스 테살로니키와 카발라를 잇는 길가. 고대 도시 레테의 귀족 묘역을 조사하던 고고학자들은 한 무덤의 석판 위에 쌓인 잿더미 속에서 검게 탄 파피루스 조각들을 발견했다. 두루마리의 아랫부분은 장례식 화장단의 불길에 타버렸지만, 윗부분은 석판 위의 재 속에 묻힌 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26개 단에 걸친 글자를 복원했고, 그렇게 약 2,3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온 한 권의 ‘책’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장례에서 불은 대개 시신과 함께 남은 것을 태워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불 덕분에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그 불 덕분에 탄화된 채로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종이가 보편화되기 전 고대 지중해 세계의 주요 기록 매체였던 파피루스는 글을 쓰기에는 적합했지만, 습기와 시간 앞에서는 매우 취약했다. 그런 파피루스가 불 속에서, 그것도 2천 년이 넘는 시간을 견디고 오늘날 우리에게 도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데르베니 파피루스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단지 ‘가장 오래 살아남은 책’이라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오르페우스의 시에 대한 철학적 주석으로 풀이되는 이 문헌의 저자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단순한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았다. 신들의 탄생과 세계의 기원을 노래한 시를 해석하면서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려 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종교와 신화, 철학과 과학적 사유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생생한 기록인 셈이다.
유네스코는 2015년, 데르베니 파피루스를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에 ‘데르베니 파피루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책(The Derveni Papyrus: The oldest ‘book’ of Europe)’이라는 명칭으로 등재했다. 이는 그리스가 세계기록유산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사례이기도 하다. 유네스코는 이 기록이 고대 그리스 종교와 철학, 나아가 서양 철학 사상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1962년 발견 이후 부분적인 판독과 번역이 이어졌지만, 전체 원문이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2006년에 이르러서였다. 검게 탄 조각 속에 잠들어 있던 한 시대의 사유가 오랜 연구 끝에 다시 읽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록을 과거의 사실을 적어 둔 문서로 생각하지만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기록이 단순한 정보의 저장을 넘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 애쓴 흔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대인들이 죽음 앞에서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 인간이 어떤 질서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는지가 이 작은 조각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록유산의 가치는 언제나 완전한 형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훼손된 조각, 불에 탄 흔적, 겨우 읽히는 문장 속에서도 한 시대의 생각은 살아남는다.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한때 불길 속에서 사라질 뻔했고, 다시 수십 년의 시간 동안 판독되기를 기다렸으며, 결국 작은 조각들로 오늘의 우리에게 닿았다.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인간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2,300여 년 전 누군가가 던졌던 이 질문들은, 검게 탄 종잇조각 속에서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묵직한 사유의 과제를 던진다.
노지영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선임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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