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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칼럼] 에너지 지정학의 시대

조선,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발전 산업까지 광범위한 부문에 비용 상승과 공급 불안을 전파한다. 더 넓게 보면 에너지 지정학은 석유와 가스에만 머물지 않는다. 2년치 연료 비축이 가능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칼럼] 에너지 지정학의 시대

권효재 COR Energy Insight 페이스북 지식그룹 대표

권효재 COR Energy Insight 페이스북 지식그룹 대표

[이투뉴스 칼럼 / 권효재]  우리는 에너지 문제를 말할 때 숫자에 익숙하다. 발전단가가 얼마인지, 온실가스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전기요금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따진다. 모두 필요한 질문이다. 정책 당국도, 산업계도, 언론도 대체로 이 틀 안에서 논의를 이어간다. 어떤 발전원이 더 싼지, 어떤 기술이 더 친환경적인지, 어느 정도의 전력 수요가 더 늘어날지에 시선이 먼저 간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필요한 에너지를 언제든, 흔들림 없이 확보할 수 있느냐다. 에너지는 시장에서만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다. 국제정치의 영향을 받고, 지리의 제약을 받으며, 때로는 군사적 긴장에 따라 가격과 물량이 함께 흔들리는 전략 자산이다. 가격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은 이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하면서도, 그 에너지가 어떤 바다를 지나 어떤 지역을 거쳐 들어오는지, 그 경로가 얼마나 불안정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약했다. 에너지 안보를 말하더라도 비축일수나 수입선 다변화 같은 익숙한 항목을 점검하는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다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특정 지역의 분쟁, 해상교통로의 봉쇄 위험, 강대국 간 제재와 보복, 공급망의 블록화가 한국의 전력과 산업에 어떤 충격을 줄 수 있는지까지 함께 봐야한다. 세계 질서가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환경과 경제성은 자주 논의했어도, 지정학에는 둔감했다. 평시에는 그 공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충돌이 발생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리스크가 곧바로 유가와 가스가격, 물류비와 전기요금의 문제로 번진다. 평소에는 추상적으로 들리던 에너지 안보 문제가 어느 순간 기업의 원가와 가계의 생활비 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4주째 이어지는 이란 전쟁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중동의 군사적 긴장은 더 이상 먼 지역의 분쟁이 아니다.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는 산업 비용과 물가, 무역 여건에 직접 영향을 주는 현실이다. 익숙하게 “유가가 오른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여서는 부족하다. 특정 지역의 불안이 세계 에너지 흐름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원유만의 문제가 아니다. 천연가스와 정제제품, 해상운임과 보험료, 선박 운항 일정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충돌이 길어질수록 시장은 실제 공급 차질뿐 아니라 불안 심리 자체를 가격에 반영한다. 에너지 안보는 위기 때 비로소 챙기는 부차적 과제가 아니라, 정책의 출발점에 놓여야 할 핵심 조건이다.

중동의 호르무즈 해협만 주목할 인은 아니다. 물론 호르무즈는 여전히 세계 에너지 공급의 핵심 관문이다. 하지만,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 수에즈 운하도 함께 봐야 한다. 이들 핵심 병목 구간들에 문제가 생기면 에너지 수송과 글로벌 물류가 동시에 압박을 받는다. 수송 기간이 늘어나고 운임이 뛰면, 단순한 물류 차질을 넘어 산업 전반의 비용 구조가 변한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도 더 무겁게 보아야 한다. 우리가 들여오는 에너지와 원자재, 우리가 수출하는 제품의 상당 부분이 이 바다를 지난다. 바다의 불안은 곧 산업의 불안이다.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진 해역은 어느 날 갑자기 뉴스의 배경이 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조선,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발전 산업까지 광범위한 부문에 비용 상승과 공급 불안을 전파한다.

더 넓게 보면 에너지 지정학은 석유와 가스에만 머물지 않는다. 2년치 연료 비축이 가능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원전 역시 연료주기와 기술 동맹의 영향을 받는다. 우라늄 확보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가공과 농축, 연료 공급망 전반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연료 조달에 문제가 없는 재생에너지 역시 핵심 광물과 공급망, 제조 기반을 둘러싼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태양광, 풍력, 배터리, 송전망 장비는 모두 특정 국가의 생산 역량과 자원 통제력에 영향을 받는다. 겉으로는 친환경 기술의 확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공급망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느 한 에너지원만 늘리면 지정학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접근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에너지 전환은 지정학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지정학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제 에너지 정책은 환경과 경제성만으로 설계해서는 안 된다. 안정적 조달 가능성, 수입선과 항로의 분산, 비상시 대체 수단, 전략비축, 우방국과의 공급망 협력까지 함께 따져야 한다. 여기에 더해 국내 전력망과 저장설비, 연료 포트폴리오, 수요관리 체계까지 하나의 안보 관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평시의 효율도 중요하지만, 위기 때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은 더 중요하다. 조금 더 싸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지역이나 특정 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평온한 시기에는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충격이 닥치면 그 선택은 곧바로 취약성으로 돌아온다.

패권 경쟁이 거세지고, 공급망은 재편되고, 해상 질서도 흔들리고 있다. 기술은 산업정책과 연결되고, 산업정책은 다시 안보정책과 맞물린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중장기 에너지 정책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도 이제는 지도를 함께 봐야 한다. 환경과 경제, 그 위에 지정학까지 놓고 판단할 때 비로소 안정적인 공급과 지속 가능한 전환을 함께 붙들 수 있다. 에너지 정책은 더 이상 비용 계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직시하는 문제다. 이제는 그 현실을 정책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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