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국장(진천주재)
중학교 국어 시간, 한 친구가 햇빛과 햇볕이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했다.
친구들의 답변이 먼저 돌아왔다. ‘배우는 것에 대해서 질문해야지. 너때문에 진도 못나가고 있어’
순간 선생님의 얼굴 위로 머쓱함이 지나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한 지인은 이를 두고 학문(學問)이 아니라 학답(學答)이라고 이름붙였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논어 위정편)
임어당은 그의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공자의 이 경구를 꺼내 들며 어째서 인간의 영혼을 일깨워야 할 배움이 이토록 사색을 억누르고 지식의 적층만을 강요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규격화된 물건을 찍어내는 ‘공장의 대량 생산 체제’에서 찾았다. 정답이라는 규격에 맞춰 아이들을 가두고, 톱니바퀴 같은 부속품으로 길러내는 대량 교육의 풍경은 공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었다.
그는 이러한 규칙적,획일적,수동적 지식의 주입주의를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개인적 즐거움으로 바꾸지 앟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공장식 모델이 태동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이 비판은 낡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 우리 교실이 마주한 가장 서늘한 자화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문명사적 대전환기인 인공지능(AI)의 파도 앞에서, 이 경구는 비상한 경고음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공장식 대량 생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빽빽한 교실, 일방향의 강연,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의 시험대 위에서 우리들은 ‘왜’라는 근원적 질문을 압수당한 채 ‘어떻게 빨리 맞힐 것인가’를 훈련받았다. 지식의 양은 눈부시게 불어났으나, 그 지식을 제 것으로 소화해 내는 주체적 사유의 힘은 허기지다. 공자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위태로운’ 길을 맹목적으로 질주해 온 셈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판을 완전히 뒤흔들고 있다. 인간이 평생을 바쳐야 겨우 머릿속에 구겨 넣을 수 있는 방대한 지식과 논리적 추론을, 생성형 AI는 단 몇 초 만에 스크린 위에 펼쳐낸다. 지식의 독점권이 무너진 것이다. 기억력과 암기력에 의존하던 전통적 경쟁력은 이미 효력을 잃었다.
이 거대한 문명적 허공 속에서 인류에게 남겨진 최후의 보루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질문하는 능력’이며, 그 질문을 빚어내는 ‘사색의 깊이’다. AI는 화려한 대답을 순식간에 쏟아내지만,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문제인지, 어떤 방향이 옳은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사색하는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교실은 지식창고가 아니라, AI가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가치를 판별하는 지적 용광로가 되어야 한다.
찰스 다윈은 ‘돌이켜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놓여 있는 여러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더 어려운 작업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고,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문제의 정의는 문제해결보다 훨씬 본질적’이라고 밝혔다.
임어당이 지적했던 공장식 교육의 그늘은 오늘 우리 사회의 입시 경쟁과 스펙트럼 속에 여전히 짙다. 그러나 AI 시대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타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임어당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해답은 잊은 채, 남이 정해놓은 정답 맞히기에만 매달려 건조하게 암기하는 현대의 지식 중심 교육과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결국 진정한 앎(학문)은 교과서나 논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과 삶의 현장 속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누리는 즐거움이어야 한다. 이제 암기의 방망이를 내려놓고, 깊고 고요한 사색의 등불을 켜 들 때다.
공진희 부국장(진천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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