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대원미디어
서늘한 가을 퇴근길, 산책하는 강아지나 어린아이를 마주치면 귀여운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난다. 그러다 문득 아무 걱정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삶이 부러워질 때도 있다.
‘출근도 안 하고, 돈이나 미래 걱정도 없이 느긋하게 먹고 놀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상에서 출발한 캐릭터가 동아시아를 휩쓰는 인기 지식재산권(IP)이 됐다. 일본어로 ‘뭔가 작고 귀여운 녀석(난카 치이사쿠테 카와이이 야츠)’을 줄인 ‘치이카와’다. 국내에서는 ‘먼작귀’라는 이름으로도 친숙하다.
● ‘극장판 치이카와’ 국내 누적 관객 190만 명…굿즈 사러 밤 새우기도
치이카와의 원형은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나가노가 2017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런 식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올린 그림에서 시작됐다. 이후 2020년 치이카와 전용 X 계정에서 본격적으로 만화가 연재됐고, 2022년에는 편당 약 1분짜리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포스터. 사진=대원미디어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다. 일본에서 지난 7월 24일 개봉한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은 10월 6일까지 관객 1178만 명, 흥행 수입 172억 엔을 기록했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30일 개봉해 22일까지 누적 관객 192만7845명을 기록했다. 개봉 4주 차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다.
국내 흥행은 2030 관객이 견인하고 있다. CGV 무비차트에 따르면 21일 기준 예매 관객 가운데 20대가 42%로 가장 많았고 30대 20%, 40대 18% 순이었다. 성별로는 여성이 69%, 남성이 31%였다.
굿즈 인기도 뜨겁다.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치이카와샵에는 지난 7일 신상품 입고를 앞두고 밤샘 대기줄이 생겼다. 자정 무렵 도착한 방문객에게도 300번대 후반의 대기번호가 주어졌다는 후기가 나올 정도였다. CGV가 치이카와·하치와레·우사기 모양으로 내놓은 팝콘통 역시 3차 예약 판매 물량까지 빠르게 소진됐다.
● 일하고 시험 보고 집 걱정까지…귀여운 세계의 냉정한 현실
치이카와는 아무 걱정 없이 먹고 놀며 살고 싶다는 상상에서 출발했지만, 정작 작품 속 세계는 녹록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제초 작업이나 스티커 붙이기, 괴물 토벌 같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더 높은 보수를 받기 위해 자격시험 공부도 한다.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 공부해야 한다.
주거 사정도 제각각이다. 치이카와는 ‘무챠우마 요구르트’의 주택 경품 행사에 당첨돼 아담한 집에서 살지만, 친구 하치와레는 문조차 없는 동굴을 집으로 삼는다.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우연과 행운에 따라 생활조건이 크게 달라지는 세계다.
귀여운 외양과 달리 세계 곳곳에는 불안도 깔려 있다. 평범했던 존재가 어느 날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친구들의 토벌 대상이 되는 장면도 등장한다. 다만 작품에서는 왜 이런 변이가 일어나는지 명확한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언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달라질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작품의 긴장감을 만든다.
노동하고 시험을 치르고 불안정한 삶을 견디는 캐릭터의 모습은 취업과 직장생활, 자격 경쟁에 시달리는 성인의 현실과도 묘하게 겹친다.
● ‘보수 100배’에 섬으로 갔더니…귀여운 얼굴 뒤의 복수극
극장판에서도 이런 세계관은 그대로 이어진다. 치이카와 일행은 ‘보수 100배’라는 제안을 받고 미지의 섬으로 향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쉬면서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이들이 맡게 된 것은 섬을 위협하는 존재를 토벌하는 일이다. 이후 일행은 섬에 감춰진 비밀과 복수극에 휘말린다.
사전 정보 없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귀여운 캐릭터와 예상 밖으로 어두운 이야기의 간극이 인상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관객 홍예성 씨는 “‘치이카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는데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과 이야기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노린 잔혹동화처럼 느껴졌다”며 “이렇게 심오한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특전 기념품을 받기 위해 영화를 두 번 관람했다는 20대 여성 관객은 “어두운 세계관이라 해석할 여지가 많다”며 “결말 해석이나 팬아트 같은 2차 창작이 활발해서 영화를 본 뒤에도 계속 찾아보게 된다”고 했다.
● “불안해해도 괜찮아” 어른에게 주는 위로
사진=대원미디어
치이카와가 그리는 세계는 냉정하지만 어둡기만 하지는 않다. 등장인물들은 힘든 일을 마친 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작은 행복을 누린다. 친구의 자격시험 합격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위험에 빠진 친구를 위해 몸을 던지기도 한다.
성격과 능력, 생활 형편은 다르지만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기보다 각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작품 속 불안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지만 친구들과 함께 견뎌낸다.
해외에서도 이런 지점에 주목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치이카와를 ‘불안한 시대에 호소력을 갖는 캐릭터’로 분석했다. 작품 속 일용직 노동과 자격시험, 외로움과 우정 등이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불안과 닮았다는 것이다.
하와이대 웨스트오아후에서 동아시아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제이슨 춘 교수는 치이카와가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을 인정하면서도 ‘불안해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건넨다고 평가했다. 그는 입시와 취업, 자격 취득, 정체된 임금 등 현실의 압박이 작품 속 세계와 맞닿아 있다고 분석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도 “각박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끼고 등장인물 간의 우정을 보며 자신의 순수했던 유년기를 회상하는 심리”라고 설명했다.
어른이 되면 책임질 일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도 늘어난다. 현실은 치이카와의 세계처럼 일한다고 언제나 보상받는 것도, 노력한다고 모든 시험에 붙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와 웃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생존기에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깊이 빠져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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