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T 연구학업 경험 발판 삼아 실리콘밸리 입성
차세대 멀티모달 연구 주도···인간 감각 결핍 보완 AI 에이전트 꿈꿔
가족·친구 응원으로 일군 '포기 없는' 연구 인생
실리콘밸리 메타(Meta) 본사 앞에 선 문지혜 박사.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AI 연구원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사진=문지혜 박사]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자란 한 청각장애 아이가 있었다. 사람과의 소통은 쉽지 않았고 많은 기회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아이는 스무 살이 돼서야 '인공와우' 수술과 긴 재활 끝에 처음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질문이 그의 삶을 바꿨다.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감각의 결핍을, 인공지능이 보완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침묵을 뚫고 실리콘밸리 최전선에서 활약하게 된 한국의 여성 과학기술인이 있다. 현재 메타(Meta) AI에서 인간의 오감을 닮은 차세대 멀티모달(Multimodal) AI를 연구하는 문지혜 박사다.
같은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의 헌신적인 응원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의 아낌없는 지원이 맞물려 빚어낸 결과다. 그의 꺾이지 않는 신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간승리였다.
◇ 내가 할 수 있을까 '질문'으로 시작된 연구 인생
"저는 청각장애로 태어났습니다. 저에게 듣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 자체가 제한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문지혜 박사는 선천성 청각장애 2급으로 태어났다. 2급은 양쪽 귀의 청력을 전면 상실하여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상태다. 때문에 수술을 받기 전까지 그의 세계는 소리 없는 세계였다. 입모양을 읽고 표정을 해석하고 맥락을 추론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문 박사는 "고등학교 시절 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처음 소리를 들었다"며 "그날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술 자체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도 많고, 수술을 받더라도 경제적 부담과 긴 재활 과정이 뒤따른다.
문 박사의 어머니도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 현실을 마주하며 문 박사는 기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연구로 이어졌다. 2015년 음성 신호처리 연구를 시작으로 음성인식, 대형 언어 모델(LLM), 센서 기반 모델, 그리고 멀티모달 비전-언어 모델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감각 정보를 언어로 변환하는 AI'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연구의 폭을 확장시켜 왔다.
◇ 좌절에서 꿈의 길 열어준 UST···장벽 앞에서 길 뚫은 사람
청각장애로 학업조차 어려웠던 시절의 수능 성적표와 이후 성장의 기록들. [사진=문지혜 박사]
연구자의 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 수술과 재활을 거쳐 중원대학교에 입학하며 뒤늦게 학업의 열정을 불태웠다.
사실 이전까지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으니 수능 점수도 영어와 수학 과목이 8등급이었고, 심지어 장애인 특별 전형을 통해서도 받아준 학교가 중원대학교였다. 이후 대학 생활동안 과수석과 장학금을 차지하며 총장상과 함께 학사 학위를 받았으나, 대학 졸업 후에도 마주한 대학원 진학의 문턱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 장학금과 연구비 지원은 필수 조건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대학원이 요구하는 '영어 듣기 성적'이 발목을 잡았다. 청각장애인에게 영어 듣기 점수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입학 거부와 다름없었다.
문 박사는 "여러 학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당했다"고 당시의 막막함을 회상했다.
그때 유일하게 연구의 꿈을 이어갈 수 있었던 곳이 UST였다. UST는 문 박사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영어 성적을 읽기 영역 중심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하게 조정했다. 문 박사는 "UST만이 유일하게 내 장애 상황을 이해하고 기회를 줬다"고 회상했다.
문 박사는 UST-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며 컴퓨터 비전과 음성 인식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실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생활비와 연구비 지원을 받은 덕분에 경제적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문 박사를 지도했던 김상훈 교수는 그의 결실이 오랜 시간 묵묵히 쌓아온 노력의 산물임을 강조했다.
문 박사는 연구 과정에서 특유의 성실함으로 소통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청각 장애로 인해 초기 논문 심사 리허설 등에서 피드백을 주고받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김 교수의 지침을 받으면 이를 스펀지처럼 흡수해 다음 리허설에서 완벽하게 반영해오는 저력을 보였다.
김 교수는 그를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학생"으로 기억하며 "장애로 인해 정보 접근이 제한적이었을 뿐 연구자로서의 잠재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현재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제자를 보며 "지혜의 행보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희망이 될 것 같다"며 "연구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진심 어린 응원을 덧붙였다.
2018년 ICT 컨퍼런스에 참석한 석사 과정 당시의 문지혜 박사. 음성 인식과 컴퓨터 비전을 아우르는 연구를 향한 열정은 이때부터 이미 뜨거웠다. [사진=문지혜 박사]
이러한 스승의 신뢰와 치열한 노력이 맞물려 쌓인 연구 경험은 훗날 학비 전액 면제와 생활비 지원을 보장받으며 미국 코네티컷대학교 박사 과정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문 박사는 이곳에서 비전과 센서, 음성, 언어 모델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연구 영역을 개척하며 자신만의 탁월한 연구 성과를 입증했다.
연구 현장에서 장애는 끊임없는 난관으로 이어졌다. 언어 발달 지연으로 인해 자신의 연구 아이디어를 말로 설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그룹 대화나 복잡한 학술적 논의 과정에서는 발음이 꼬이거나 동료들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 박사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오히려 자신만의 핵심 역량으로 키웠다. 말로 모두 전하지 못하는 논리를 글과 그림으로 정교하게 정리하는 '문서화 능력'을 생존 전략으로 삼았다.
시각 자료를 활용한 소통 방식은 그의 발표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만들었고, 이는 박사 과정 동안 10편 이상의 1저자 논문을 발표하며 '발표가 가장 명확한 학생'이라는 이례적 평가를 받게 됐다.
문 박사는 "청각 장애는 분명한 난관이었지만, 동시에 연구 여정을 지탱하고 더 깊은 시각을 갖게 해준 중요한 자산이었다"고 강조했다. 결국 그는 UST 연구실 역사상 글로벌AI 빅테크에 입성한 첫 번째 졸업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미국 코네티컷대 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어머니, 지도교수와 함께한 문지혜 박사(왼쪽). 가난과 장애 속에서도 '마음의 근육'을 길러준 어머니의 헌신과 잠재력을 믿어준 스승의 지지가 일궈낸 순간이다. [사진=문지혜 박사]
◇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학위 연구와 구직 활동을 병행했던 문 박사는 박사 학위를 받기 전에 이미 메타 합격 통보를 받으며 실리콘밸리행을 확정 지었다. 구직 활동 과정에서, 메타뿐만 아니라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면접을 봤다. 처음 인터뷰를 봤을 때 소통의 한계로 준비한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문 박사를 다시 일으켰다. 문 박사는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힘든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연구에서 겪는 어려움은 예전 삶과 비교하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며 "박사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지만 제가 성장했던 과정과 비교하면 괜찮게 느껴졌고, 그 경험을 통해 고난들이 결국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한 번도 포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유다.
그는 매일같이 말하기와 읽기 연습에 매진했다. 자신의 연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과정 등 심적으로 힘든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이 험난한 여정을 버티게 한 것은 주변의 든든한 지지자들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문 박사에게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절망 대신 강인함을 가르쳤다. 문 박사는 어머니를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게끔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주신 분"이라며 "똑똑한 자질을 갖췄음에도 기회가 없었던 어머니를 보며 기술로써 누군가에게 기회를 선물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남편의 헌신 역시 결정적이었다. 남편은 문 박사의 꿈을 위해 본인의 생활 기반을 뒤로하고 기꺼이 실리콘밸리로 함께 이주했다. 가능한 범위에서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하며 아내의 곁에서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곁을 지킨 곽이라 친구의 응원도 큰 힘이 됐다. 중학교 무렵 그가 건넨 "지혜야, 너는 귀가 안 들리지만 하고자 하면 할 수 있어"라는 한마디는 문 박사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줬다. 결국 곁을 지켜준 이들의 신뢰와 문 박사의 치열한 노력이 맞물려 마침내 메타 합류라는 맺으며 자신의 꿈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 메타에서 그리는 AI의 미래
국제 학회에서 멀티모달 AI 연구를 발표 중인 문지혜 박사. 감각 정보를 언어로 변환하는 연구로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사진=문지혜 박사]
현재 문 박사는 메타AI에서 이미지와 비디오 같은 시각 정보를 이해하고 이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멀티모달 비전-언어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AI가 장면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거나, 사람의 행동과 의도를 언어로 설명하는 기술이다.
이 연구가 그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이유는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생 입 모양과 표정, 상황의 맥락을 통해 대화를 이해해 온 그는 인간의 소통이 말소리 하나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깊이 체감해 왔다.
문 박사는 "일상에서 소리뿐만 아니라 입 모양이나 표정 같은 시각적 단서를 통해 대화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사람의 의사소통은 단순한 말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감각 정보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AI가 이러한 다양한 감각 정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의 행동과 의도를 더 깊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연구 신념이다.
문 박사는 앞으로 5~10년 내 AI가 단순한 정보 제공 도구를 넘어 '개인 맞춤형 지능형 에이전트'로 진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청각장애인에게는 주변 대화를 실시간 자막으로 변환하는 것을 넘어 화자의 감정이나 대화의 분위기까지 전달하는 기술이 가능해질 것"이라며 "시각장애인에게는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해 주는 '제2의 눈'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가령 청각장애인에게는 주변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르거나 자동차 경적 같은 위험한 소리가 들릴 때 이를 진동이나 시각적 알림으로 즉시 전달해 줄 수 있다.
언어 장애나 신경 마비로 인해 말을 하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근육 신호나 뇌 신호 같은 생체 신호를 센서로 감지하고 이를 인공지능이 해석해 사용자의 의도를 텍스트나 음성으로 변환하는 기술도 가능하다.
문 박사는 "기술의 핵심은 항상 곁에 있는 보조 감각"이라며 "인공지능이 주변 상황을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바로 전달하며 소통을 도와준다면, 기술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우리의 감각과 의사소통 능력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문 박사가 그리는 AI의 미래는 단순히 똑똑한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적 한계를 보완해 소외된 이들을 세상과 잇는 '통로'가 되는 기술. 그것이 문 박사가 꿈꾸는 AI다.
문 박사는 "언젠가 인공지능이 제 어머니처럼 기회에서 소외된 분들에게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감각이 되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문 박사는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고자 하는 한국의 연구자들에게도 진심 어린 조언을 잊지 않았다. 서른세 살, 촉망받는 젊은 연구자로서 그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도전의 과정은 때로 버겁고 힘들지만, 그 안에서 배우며 더 단단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연구 과정에서 마주하는 실패나 문제들이 오히려 버틸 수 있는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며 "돌아보면 그런 경험들이 저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새로운 환경에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고 덧붙였다.
문 박사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의 어려움과 시도는 결국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 준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기회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며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편, 문 박사는 AI 접근성 기술에 대한 협업이나 학술적 소통을 원하는 이들과의 연결을 기다리고 있다. 문 박사의 연구 활동과 소통은
링크드인
을 통해 가능하다.
김요셉·홍재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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