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신한금융, 사진=Gemini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이 5년 전부터 구상한 ERP(전사적자원관리) 뱅킹 모델 'DJ Bank'가 제주은행에서 본격 출범했다. 기업의 ERP 시스템 안에서 금융을 구현하는 새로운 기업금융 실험이다. 신한금융이 첫 도전 무대로 제주은행을 내세우면서 그룹 기업금융 전략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시선이 쏠린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금융은 지난 2일 더존비즈온과 협력한 ERP 기반 기업금융 서비스 'DJ Bank'를 공식 선보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기업 내부 시스템인 ERP와 금융 서비스를 실시간으로 연결했다. 기업이 별도의 은행 방문이나 서류 제출 없이 ERP 화면 안에서 대출, 계좌 개설, 자금 관리 등을 수행할 수 있다.
ERP뱅킹은 기존 기업금융의 구조적 한계를 겨냥한 시도로 평가된다. 그동안 기업금융은 재무제표 등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심사와 대면 중심 절차에 의존해 왔다. 반면 이번 모델은 ERP 데이터를 활용해 기업의 매출, 거래, 자금 흐름 등을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신한금융은 약 400만 기업 데이터를 보유한 더존비즈온과도 협업해 기존 금융권이 확보하기 어려웠던 기업 내부 데이터를 활용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안신용평가모형, ERP 연계 대출, AI 기반 자금관리 서비스 등 새로운 기업금융 상품도 함께 선보일 계획이다.
진옥동 구상이 현실로…제주은행에 쥐어진 '키'
눈에 띄는 지점은 실행 주체로 신한은행이 아닌 제주은행을 선택한 점이다. 신한금융은 이번 'DJ Bank' 출범에 신한은행이 아닌 제주은행을 전면에 내세웠다.
제주은행은 지방은행으로서 역할과 경쟁력을 두고 고민이 이어져온 곳이다. 새로운 성장 전략이 필요한 상황에서 ERP뱅킹 도입은 정체성 자체를 전환하려는 노력으로 해석된다. 이희수 제주은행장은 DJ Bank 출범식에서 "제주은행이 지방은행으로서 존재 가치가 미묘한 상황에서 고민을 이어가던 시점에 (진옥동 회장이) ERP뱅킹이라는 특명을 주셨다"고 언급했다.
제주은행이 첫 무대로 낙점된 데에는 조직 특성도 고려된 모양새다. 제주은행은 신한은행보다 규모가 작아 조직이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적용하고 검증하는 데 부담이 덜한 환경이라는 분석이다. 또 이 모델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경우 기업금융 분야에서의 입지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신한금융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분산하면서도 새로운 모델을 시험할 수 있는 셈이다. 기업금융에 적용되는 모델인만큼 신한은행에 즉시 도입하기엔 무게감이 있어서다. 초기 도입이 성공할 경우 그룹 전반으로 확장할 수 있는 여지도 열려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의 중장기 전략과 맞닿아 있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진옥동 회장은 약 5년 전부터 ERP 데이터와 금융의 결합 가능성에 주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 회장의 지휘 아래 신한금융은 2021년부터 본격적인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내부적으로는 '디지털 제주 프로젝트'로 추진되며 사업 구조를 점진적으로 구체화해왔다.
치열한 기업금융 경쟁에 승부수 던지는 신한금융
진옥동 회장의 이번 시도에는 기업금융 경쟁력 강화라는 과제도 깔려 있다. 현재 금융지주사들은 기업금융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자이익 성장 여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개인금융 중심 전략의 한계가 뚜렷해서다. 이에 금융지주사 전반에 기업금융 부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반면 일각에선 기업금융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기존 기업금융은 대면 중심 절차와 복잡한 심사 과정 등으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구조다. 중소기업의 경우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리스크 관리도 쉽지 않다. 이에 금융사들은 새로운 데이터 기반 신용평가와 비대면 기업금융 모델로 수익성과 효율성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신한금융의 ERP뱅킹 전략은 이 같은 기업금융 운영 방식 자체에 변화를 주려는 모습이다. 기업 데이터를 활용한 금융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도라는 평가다. 금융 서비스를 기업 업무 흐름에 내재화할 경우 대출 등 금융 집행 확대와 리스크 관리 고도화를 동시에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채훈 제주은행 부행장은 "DJ Bank는 기업들이 ERP 화면에서 모든 금융 업무를 끝낼 수 있게 했다"며 "기업 ERP 화면 안에 은행 지점이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ERP뱅킹이 기업금융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다만 과제도 적지 않다. ERP 데이터의 신뢰성과 활용 범위, 금융 규제와의 충돌 가능성, 특정 플랫폼과 의존도 문제 등이 향후 사업 확장 변수로 꼽힌다. 이런 모델이 실제로 기업 고객의 금융 이용 방식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앞서 진옥동 회장은 출범식에서 "ERP뱅킹은 기업의 실제 업무와 금융을 연결해 과거의 데이터로 현재의 기업을 평가해온 기존 기업금융의 한계를 넘어보고자 오랜 시간 고민해온 사업"이라며 "제주은행이 이런 새로운 기업금융 모델의 출발점이 돼 지역은행의 한계를 넘어 더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서비스는 이제 출범한 단계로 신한은행 도입 여부는 조금 더 지켜본 후 윤곽이 나올 것"이라고 전했다.
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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