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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지루한 업무에 차가운 소진…보어아웃 주의보 [스페셜리포트]

보어아웃은 업무 과다와 과로에 따른 소진을 뜻하는 ‘번아웃(Burn-out)’의 정반대 개념이다. 업무의 양이 너무 적거나(업무 과소), 지나치게 단조로워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발생하는 만성적 무기력증을 뜻한다.

지루한 업무에 차가운 소진…보어아웃 주의보 [스페셜리포트]

# 프랑스 향수 회사 ‘인터퍼퓸’의 전직 직원 프레데릭 데스나르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4년 동안 핵심 업무에서 배제된 채 하루 20~40분 내외의 단순 잡무만을 수행했다며 ‘과로’가 아닌 ‘지루함’에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골자였다. 데스나르는 “지옥 같은 단조로움 속에서 영혼이 파괴됐다” “회사가 나를 좀비로 만들었다”며 36만유로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법원은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하고 회사에 4만유로 배상을 명령했다.

직원이 지루한 업무와 방치에 힘들어 하는 ‘보어아웃(Boreout, 잠깐용어 참조)’ 증후군이 새로운 경영 리스크로 주목받고 있다. AI를 통한 업무 자동화가 확산되며 사람이 단순 반복적인 관리 업무만 하는 등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나는 ‘노동 소외’ 현상이 보어아웃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조직과 개인의 동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직무 재설계, 피드백 체계 확립 등 조직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직원이 지루한 업무와 방치에 힘들어 하는 보어아웃 증후군이 새로운 경영 리스크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직장인들의 모습. (한주형 기자)

보어아웃이 뭐길래

지루한 업무와 방치도 직장 내 괴롭힘?

보어아웃은 업무 과다와 과로에 따른 소진을 뜻하는 ‘번아웃(Burn-out)’의 정반대 개념이다. 업무의 양이 너무 적거나(업무 과소), 지나치게 단조로워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발생하는 만성적 무기력증을 뜻한다. 2007년 스위스의 비즈니스 컨설턴트 피터 베르더와 필리페 로틀린이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업무가 적고 쉬우면 오히려 좋은 것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조직과 직원 모두에 부정적이다. 에너지가 방전되는 번아웃이 외부로 폭발하는 증상이라면, 보어아웃은 조직의 생산성을 안으로부터 갉아먹는 ‘조용한 비효율’에 가깝다. 직원도 당장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경력 관리와 역량 개발 측면에선 시간 낭비일 수밖에 없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은 “사람은 명확한 목표, 즉각적인 피드백, 자율권이 있을 때 몰입한다. 또 현재 역량보다 10~20% 높은 난도의 과제가 주어질 때 가장 몰입한다. 이 균형이 깨진 조직에서 보어아웃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고 짚었다.

보어아웃이 번아웃보다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기력과 권태가 과로보다 은밀하게 퍼지고, 조직이 알아차리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더 까다롭기 때문이다. 번아웃은 힘들다는 호소가 비교적 겉으로 잘 드러나지만, 보어아웃은 숨어 있다는 얘기다. 김 소장은 번아웃이 ‘뜨거운 소진’이라면 보어아웃은 ‘차가운 소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겉으로는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바빠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미 없는 부산함만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조직이 문제를 알아차리기 어렵고, 시간이 지나면 비생산성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어아웃에 따른 폐해는 세대별로 다른 양상을 띠며 조직을 잠식한다. MZ세대에게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로 나타난다. “이 회사는 나를 성장시키지 못한다”는 판단이 서면 최소한의 일만 하며 열심히 일할 동기 부여가 끊어진다. 반면 중장년층은 명퇴 압박이나 직무 소외 속에서 ‘버티기’ 모드로 들어가기 쉽다.

문제는 보어아웃이 번아웃으로 가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 구성원의 업무 의욕과 성과가 저하되는 초기 증상에 무관심했다간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직무 소진 단계를 크게 5가지로 제시한다. 일이 너무 적고 단조로워 의욕이 저하되는 ‘보어아웃’, 방치된 역량이 부식되고 녹슬어가는 공포를 느끼는 ‘러스트아웃(Rust Out)’, 겉으론 멀쩡히 일하는 것 같지만 열정과 창의성이 실종된 ‘근면한 좀비’ 상태의 ‘브라운아웃(Brown Out)’, 과로에 심신이 피폐해져 아슬아슬하게 구워지는 ‘토스트아웃(Toast Out)’, 그리고 결국 모든 에너지가 방전돼 새카맣게 타버리는 ‘번아웃(Burn Out)’ 순이다. 보어아웃 상태의 직원을 방치하면 조직의 잠재적 리더들이 브라운아웃을 거쳐 번아웃으로 침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 직장인 상당수가 보어아웃 증후군에 노출될 수 있음은 여러 조사에서 확인된다.

잡코리아가 지난 2024년 직장인 1294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85.2%의 직장인들이 직장생활 사춘기, 즉 ‘직춘기’를 겪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 경험이 없다고 응답한 직장인은 14.8%에 불과했다. 직춘기를 겪는 이유로는 ‘반복되는 업무에 지쳐서’라는 응답이 34.2%로, ‘낮은 연봉 등 경제적 보상이 부족해서(46.1%)’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복수응답 기준).

주목할 점은 ‘많은 업무량 때문에 워라밸이 사라져서(24.8%)’가 세 번째였다는 것.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든 ‘번아웃’보다 너무 적어 권태로운 ‘보어아웃’이 더 위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직춘기를 겪는 이유에 대해 ‘반복되고 의미 없는 업무에 회의감이 들어서(42.4%)’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의미(성취감)를 느낄 수 없어서(36.6%)’라는 응답이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지쳐서(36.3%)’라는 응답보다 많았다.

보어아웃은 특히, 주니어 직장인에게 당면 과제로 대두된다. 직춘기를 겪었던 경력 연차를 묻는 질문에 ‘1년 차에 겪었다’는 응답이 24.4%로 가장 많았다. 이어 3년 차(18.9%), 2년 차(17%), 입사와 동시에(16.6%) 순이었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이 근무 3년 차 이내에 보어아웃 등으로 인한 직춘기를 경험한다는 얘기다.

보어아웃 막으려면

C레벨·관리자·실무자 역할 재설계

과도한 업무로 인한 번아웃과 달리 보어아웃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단순히 일을 줄여준다고 능사가 아니다. 업무의 양보다, ‘단조롭고 의미 없는’ 업무의 질이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일의 의미와 난도가 구성원의 역량, 관심사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다는 것. 보어아웃을 막기 위해 기업 차원의 제도 정비와 함께 경영진, 중간관리자, 실무 직원의 직급별 대응이 병행돼야 하는 이유다.

우선 경영진(C레벨)은 조직 전반의 ‘가짜 바쁨’을 걷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김성회 소장은 “쓸데없는 보고, 형식적 회의, 불필요한 절차가 쌓이면 조직은 바쁜 척만 하는 구조로 굳어진다”고 지적한다. ‘업무를 위한 업무’를 최대한 제거해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업무에 매진하고 몰입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성과 평가 기준도 바꿔야 한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의미 있는 결과를 냈는가’를 잣대로 삼으라는 조언이다. 가령 마케팅비를 써서 광고 노출 빈도와 조회 수만 잔뜩 높이기보다, 실제 매출이나 고객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근무 시간이나 야근 빈도가 성실성의 척도가 돼선 안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대표는 “같은 업무라도 책임 범위나 의사결정 참여폭이 넓어지면 몰입도는 달라질 수 있다”면서 “업무량 자체보다 결과의 질과 기여도를 중심으로 평가 기준을 바꾸고, 불필요한 보고나 회의 같은 형식적 업무를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동시에 경영진은 구성원이 자신의 일이 조직 전체 성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큰 방향과 맥락을 제시해야 한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라도 그 일이 어떤 결과를 만들고 어떤 성과에 기여하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구성원은 무기력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사람은 단순히 일을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 조직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때 동기가 유지된다”고 강조한다.

중간관리자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보어아웃은 업무 현장에서 발현되지만, 번아웃처럼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아 세심한 관심과 대화가 요구된다.

특히 최근 인공지능(AI)과 업무 자동화가 확산하는 현상은 보어아웃을 부추길 수 있다. 따라서 관리자는 단순히 업무를 줄이는 데 그치지 말고, 사람이 할 일과 AI가 할 일을 구분해 업무를 재배치, 재설계해야 한다. 곽금주 교수는 “단순 검수·보고 중심의 역할에 구성원을 묶어두면 오히려 보어아웃이 심화할 수 있다”며 “구성원에게 판단, 창의, 협업 중심의 업무를 맡기고 업무 과정에서 지속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일 교수도 비슷한 조언을 전한다. “업무 진행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동기 부여를 하는 핵심 방법이다.”

경영진과 중간관리자가 아무리 열심히 동기 부여를 해도 구성원들이 수동적인 태도에 머무르면 한계가 있다. 전문가들은 직원 스스로도 능동적으로 일의 의미를 찾고, 업무 성과와 성장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천장현 대표는 “AI 사용이 보편화됐다고 해서 업무를 편하게 하는 데 그치지 말고, 업무 역량 자체를 높일 방법까지 확장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AI가 처리한 업무를 검수하는 ‘사용자’에 머무르지 말고, 업무 구조를 개선하는 ‘설계자’로 스스로 역할을 넓혀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는 개인의 성장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보어아웃을 예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직급별 대응과 함께 기업 차원의 제도 정비도 선행돼야 한다. 핵심은 ‘직무 재설계’와 ‘피드백 체계 강화’다.

먼저 직무 설계부터 손봐야 한다. 특정 인력에게 단순·반복 업무가 과도하게 몰리지 않도록 하고, 직무 순환이나 프로젝트 기반 업무를 통해 주기적으로 역할에 변화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보어아웃’ 저자 필리페 로틀린 SFP투자재단 이사는 “직무를 설계할 때는 의미 있는 업무, 명확한 책임, 역량을 활용할 기회가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무를 수행한 뒤에 적절한 피드백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히 일의 결과만 점검하고 끝나는 구조에서는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과 기여도를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업무 진행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자신이 맡은 일이 조직 성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지속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김성회 소장은 “조직 성과를 공유할 장을 마련하는 한편 교육과 성장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며 “반복 업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권태감이 커지는 만큼, 구성원의 역할을 확장할 수 있도록 직무 관련 교육이나 새로운 업무를 경험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어아웃 자가진단 체크리스트

보람 없고 무기력하다면 ‘변화 주기’

보어아웃은 단순히 시간이 남아 지루한 상태와는 다르다. 업무에 대한 흥미와 몰입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예전보다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면 보어아웃을 의심해볼 만하다. 업무 시간 중 인터넷 검색이나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쓰는 비중이 늘어나고, 만성적인 피로감과 무기력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등 정신적 변화가 동반되기도 한다. 두통, 소화불량, 수면장애, 면역력 저하 같은 신체 증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자존감이 낮아지고 ‘내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이 커지는 점은 번아웃과 다른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보어아웃’ 상태인지 스스로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로 다음 질문들을 제시한다. ‘업무 생산성이 낮고 집중이 어렵다’ ‘일에서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업무를 떠올리면 공허함이 든다’ ‘새로운 프로젝트나 업무에 대한 관심이 없다’ ‘업무량이 많지 않은데도 피로감이 크다’ ‘퇴근 후나 주말에도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낸다’ 등이다. 이런 상태가 3개월 이상 이어진다면 단순한 권태를 넘어선 보어아웃 가능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보어아웃 극복의 출발점은 ‘업무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우선 지루하고 반복적인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사 측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변화를 요구해볼 만하다. 새 프로젝트 참여를 요청하거나 업무 프로세스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식으로 직무 재설계를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사와 1:1 면담을 신청하거나, 교육·세미나 참석, 온라인 강의, 독서 등으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익히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단기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작은 성취라도 스스로 인정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팀원과 협업 기회를 늘리고, 멘토링이나 후배 지도 역할을 맡아 관계와 역할을 넓히는 것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작업 공간을 정리하고 규칙적으로 휴식·스트레칭·산책을 하는 등 업무 환경을 손보는 것도 권태감 해소에 도움이 된다.

[잠깐용어]

*보어아웃(Boreout)

업무량이 지나치게 적거나 난도가 낮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없고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해 겪는 만성적인 무기력증과 권태감을 뜻한다. 업무 과다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소진을 뜻하는 ‘번아웃(Burn-out)’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2007년 스위스의 비즈니스 컨설턴트 피터 베르더와 필리페 로틀린이 제시했다. 단순히 일이 편해서 느끼는 일시적 나태함과 달리, 조직 내 ‘방치’와 ‘소외’로 인해 자존감이 급격히 하락하고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노승욱 기자 noh.seungwook2@mk.co.kr, 정다운 기자 jeong.dawo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5호(2026.04.15~04.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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