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기득권이 날 탄압한다”는 트럼프
“사법·흉기·명예 살인 가해졌다”는 李
자기 피해 우선하는 지도자 공감 어려워
편집자주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논설위원과 뉴스룸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을 위해 12일 전용기에 탑승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AP 뉴시스
이 글은 강력한 현실 권력을 지녔음에도 스스로를 ‘탄압의 피해자’로 규정하며 진짜 피해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도덕적 우위와 사회적 배려를 선점한 정치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살펴볼 것은 ‘피해자성 가로채기’(hijacking victimhood)란 개념. 정치사회학자 제시 바튼 흐로네쇼바와 언론학자 대니얼 크레이스의 2024년 논문에 등장한다. 두 사람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헝가리 전 총리 오르반 빅토르의 발언을 연구해, 최고 지도자가 자신을 ‘피해자 서사’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정적을 공격하고 열렬한 지지를 이끈 전략을 간파했다.
원래 피해자 중심주의는 인권 침해 당사자나 소외 계층이 경제사회적 정의를 요구할 때 활용되는 도덕적 무기다. 그러나 트럼프와 오르반은 이 개념을 차용해 백인 남성 등 기득권을 피해자인 양 둔갑시켰다. 이들의 시도는 ‘바꿔치기’에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를 피해 집단 대표로 상정, 자신이야말로 부당한 피해를 원상회복할 구원자임을 천명한다. ‘트럼프 월드’에서 미국·미군·미국인은 항상 아시아·나토·이민자에게 당하는 약자 포지션이며, 트럼프 자신은 좌파 기득권의 탄압을 받는 투사다. 그는 “역사상 어떤 정치인도 나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 없다”고 말하며, 특별검사 기소엔 “내가 여러분 대신 기소된 것”이라면서 사법 박해를 주장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한국에서도 특이한 모습이 펼쳐진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에게 △사법살인(검찰) △흉기살인(가덕도) △명예살인(언론)이 가해졌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검찰·언론 등 ‘기득권’의 탄압을 받은 피해자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트럼프·오르반의 시도가 날조와 코스프레에 가깝다면, 이 대통령의 주장은 과장 쪽에 더 붙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두 번 경험하고 불법 계엄으로 체포될 뻔한 극적인 정치 역정을 보면, 그리 생각할 수 있겠다 싶은 지점도 있다.
그럼에도 거대 여당과 지지율을 업은 임기 초 대통령이 미확정 사실을 근거로 스스로를 피해자로 칭하는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다. 어젠다 주도권과 국정 통제권을 지닌 대통령이 자기 피해 사실을 언급하면, 행정·수사·사법기관도 어쩔 수 없이 유무형의 압박을 받는다.
특히 정치 지도자의 피해의식이 위험한 건 대개 ‘보상심리’나 ‘복수심’과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정도 피해를 당했다면, 지금 이 정도 특혜를 받는 건 문제 될 게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검찰이 횡포를 부렸으니 공소취소 정도는 할 수 있고, 부당한 보도에 숱하게 당했으니 가짜뉴스 명목으로 언론사에 심대한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힘센 자가 가장 적극적으로 제 처지를 호소하고, 끝내 귀중한 사회적 효용을 챙기는 세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정치인이 어느 정도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대통령이 재직 중 자기 한을 풀거나 과거 피해를 보상받으려는 모습까지 납득할 국민은 많지 않다. 다수 중도층이 검찰개혁에 동의하면서도 공소취소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성공한 지도자로 남은 비결 중 하나는 진짜 피해자였음에도 당선 후 피해자로서 도덕적 우위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DJ는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취임사 약속을 지켰고, 과거 대신 미래를 직시했다. 그의 문화 융성 정책과 정보통신 인프라 투자가 지금의 한류·IT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성공한 대통령들은 모두 처지에 매몰되지 않고 ‘초월’에 성공한 지도자들이었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 대신, 나라의 밝은 미래를 얘기하는 지도자가 결국 역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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