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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묘를 닮은 황윤석도서관에서 고창이라는 책을 읽다

씨티은행과 유수 증권사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MI·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

종묘를 닮은 황윤석도서관에서 고창이라는 책을 읽다

[지혜의 숲을 찾아서 ㊵]

시간이 겹겹이 쌓인 고창의 서사

황윤석도서관에서 서점 마을까지...

친구가 난데없이 고창 황윤석 도서관과 서점 마을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뉴스버스에 도서관 탐방기 '지혜의 숲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나에게 이곳은 성지순례 같은 장소라는 것이다.

새벽 6시에 출발해 밤 11시에 돌아오는 빠듯한 일정.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그럴까 싶었지만,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상상 속에 그려 둔 공간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의 떨림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북 고창군 '고창황윤석도서관' (사진=연합뉴스/ 고창군청)

종묘의 장엄함을 닮은 지혜의 공간

3시간을 달려 도착한 황윤석 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보니,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의 도서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목재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늘어선 외관은 마치 단일 건물로 가장 긴 목조 건축물인 종묘를 떠올리게 한다. 미리 공부를 하고 온 친구는 건축가 유현준 씨가 종묘를 생각하며 지은 곳이라며, 종묘가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고 알려준다. 완만한 내리막 산 등성이처럼 오른쪽으로 갈수록 지붕이 비스듬히 내려가는 모습도 특이하다.

문을 여니 긴 공간이 시원하게 열린다. 우측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통유리 행렬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이 한가로운 느낌을 주는 반면, 좌측부터 우측 끝까지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하얀 서가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마치 한지 문풍지와 문짝을 옆으로 크게 이어놓은 것 같다. 이 또한 한옥의 문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 천장 끝까지, 저 멀리 공간의 끝까지 채워진 하얀 서가는 점점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가는 지붕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어 마치 눈 덮인 하얀 산처럼 보인다. 그 책산 위로는 긴 천창이 나 있어, 오전의 햇살이 흘러든다.

그 책산 사이에 뚫린 공간들을 지나면 뒤편에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난다. 책산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개방감을 주는 반면 반대편은 아늑함을 연출해 다양한 공간을 경험하는 재미가 있다. 이리 저리 공간을 숨바꼭질하듯 둘러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러운 경사지를 영리하게 활용한 덕분에 2층 또한 반대편 도로와 맞닿은 또 다른 '1층'이 된다. 어디에 있든 땅과 맞닿아 있어 외부에서 쉽게 걸어 들어올 수 있는 개방감이 건축가의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황윤석 도서관의 실내 공간, 지붕 모양을 따라 서가가 산 모양으로 보인다. (사진=김희연)

건축가는 밖에서 보면 종묘 같은 느낌이되, 내부에서는 전통과 현대가 기하학적으로 교차하는 반전의 다양함을 주고, 책을 읽는 공간을 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도시 안의 거실'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였구나. 이 공간을 걸어 보니, 그러한 건축적 사유 속에 탄생한 공간임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도서관의 이름이 된 황윤석은 고창이 배출한 조선 후기 실학자다. 도서관 한편에는 그가 남긴 57책 6천 장 분량의 방대한 백과사전식 일기 '이재난고'가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일상의 결을 촘촘히 기록한 거대한 타임캡슐, 그의 이름이 왜 이 도서관의 이름이 됐는지 납득이 간다.

고창황윤석도서관 내부. (사진=김희연)

도서관에서 미리 만난 고창의 명장면들

도서관에는 다양한 코너가 있었지만,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곳은 '고창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 코너였다. 풍광이 아름다운 고창은 오랫동안 많은 작품의 촬영 무대가 되어 왔다. 초록빛 청보리밭이 배경이 된 드라마 '도깨비'와 선운사의 풍경이 인상 깊었던 '대장금'처럼, 수십 작품이 이곳의 계절과 빛을 화면 속에 담아 왔다.

"누구의 인생이건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드라마 '도깨비'의 한 문장이 적힌 팻말 앞에 서 있자니,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그런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만의 빠듯한 여정이지만, 이 공간이 주는 편안한 압도감과 다양함은 어떤 긴 여행보다도 밀도가 높았다.

풍경이라는 텍스트를 읽어 내려간 시간

도서관에서 고창에 대한 '예습'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고창이라는 거대한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도서관 바로 옆, 조선 단종 때 백성들이 쌓았다는 고창읍성으로 향했다. 종묘를 닮은 황윤석도서관이 전통과 현대미가 어우러진 웅장하고 세련된 공간이라면, 고창읍성은 옛것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풀어놓아 소박해서 편안한 공간이었다. 무병장수를 위해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 위를 걷는 '답성놀이'가 유명하다고 해서 성곽 위를 돌았고, 그 아래 여기저기 흩어진 색 바랜 한옥,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대나무 숲 사이를 걸었다.

바람 부는 청보리밭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초록 물결과 그 옆 유채밭의 노란 일렁임을 보자니 고창이 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붉은 동백과 가을 단풍으로 이름난 선운사, 원시 생태계의 숨결을 간직한 람사르 습지, 수천 년 전 인류의 무덤이 남아 있는 고인돌 군락, 그리고 푸른 목초지가 펼쳐진 상하농원까지 고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야외 세트장이었다.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자연속 갤러리 같았다.

고창 읍성과 파란 하늘 (사진 = 김희연)

여정의 끝, 서점 마을에서 맺은 마침표

꽉 찬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은 도서관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고창 서점 마을이었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어느 서점에선가 은은한 커피 향이 흘러나왔고, 알록달록 작은 서점들이 저마다의 취향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픽과 만화로만 구성된 서점, 생태와 농업을 주제로 한 서점, 시집을 중심으로 꾸며진 서점,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그림책 서점, 목수가 만든 서점까지. 하나하나의 공간에 주인의 취향과 삶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렇게 다양한 서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서점 마을의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 (사진 =김희연)

서점 마을의 골목을 걸으며 오늘 하루를 조용히 돌아보았다. 3시간을 달려와 황윤석 도서관이라는 웅장한 서문을 읽고, 고창읍성과 청보리밭이라는 깊이 있는 소박함과 자연의 본문을 지나왔으며, 서점 마을이라는 아기자기한 에필로그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이동 시간 때문에 짧을 수 밖에 없는 하루짜리 여정인데도 마음은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밤길, 고창은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를 잔뜩 남겨둔 책 같았다. 다음에는 긴 시간을 내어 와야겠다. 하루 내내 도서관의 거실에 머물고, 또 하루는 선운사에 취해 있고, 또 하루는 서점 마을의 한 모퉁이에 앉아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때가 되면, 오늘 미처 읽지 못한 고창의 문장들이 얼마나 설레게 할지...

김희연

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과 유수 증권사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MI·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차별화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AI활용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 강의>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 'AI시대 인(人)사이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감지능시대>와 최근 출간된 <리더는 AI에게 질문하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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