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단극체제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고, 경제·안보·외교·기술이 얽힌 복합위기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이 저변에는 세계 판도를 두고 경쟁하는 미·중관계가 놓여 있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의 공세에 위기감을 느껴왔으나, 미·이란 전쟁에서 미국 패권의 한계를 목격했고 과학기술과 공급망 생태계를 구축한 후, 높아진 자신감을 대외정책에 투사하고 있다. 현 단계 미국은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중국의 무릎을 꿇릴 수는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전략경쟁의 틈바구니에 낀 국가들도 진영 대신 사안별로 국익을 추구하는 다중정렬(multi alignment) 전략을 취하고 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숨 가쁜 정상외교도 이런 위기 징후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국익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질서 변동은 동북아에도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한·미 및 미·일 동맹 현대화를 통해 한·미·일을 결속해 ‘사회주의 중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이 지역에 단거리 전술핵을 전진 배치하는 카드를 논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편, 북·중·러는 집단방위와 같은 안보협력을 제도화하기 어렵지만, 북·중, 북·러, 중·러 간 양자 협력은 전례 없이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탈냉전 이후 가장 높아졌다. 중국과 러시아도 북한이 제7차 핵실험 중단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유예를 전제로 북한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다.
유동적인 국제 및 동북아 질서의 변화는 한반도 위기 지수를 크게 높이고 있다.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과 ‘두 국가’를 헌법에 반영했고 군사분계선(MDL)을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 장벽을 쌓고 요새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곳에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기술을 이전받아 개선한 전차, 사거리가 연장된 자주포, 방사포, 드론 등을 집중적으로 배치해 우리 수도권을 겨냥할 태세이다. 더구나 북한의 이러한 군사행동은 ‘철천지원수’로 간주하던 미국이 아니라, ‘적대적 국가, 철저한 타국’으로 규정한 한국을 겨누기 시작했다. 이처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가 사라지면 정전체제는 형해화되고 국경선의 작은 분쟁은 확전의 위험으로 비화할 수 있다. 더구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군사회담을 열어 긴장을 완화하던 과거의 위기관리 기제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맞대응 말고는 속수무책이다.
물론 북한의 군사행동은 아직 조용하다. 윤석열 정부가 의도적으로 북한 영공에 군사 드론을 보냈을 때도 북한은 군사적으로 맞대응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교과서와 각종 문건에서 통일과 동족의 개념을 지우는 정치사회화 과정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두 국가론의 기반인 국경선을 완성하고 정밀성을 갖춘 군 재편까지 이룬다면, 서해 북방한계선(NLL)까지 자신의 영해로 주장하면서 국지적 충돌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적대의 틀을 깨는 데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다.
우선 경제, 안보, 외교가 한 몸으로 움직이는 국제질서를 명민하게 읽으면서 한·미 동맹과 함께 전략적 자율성을 몸에 익혀야 한다. ‘불편한 진실’인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금기도 넘어서야 한반도 평화의 바늘구멍이라도 찾을 수 있다. 사실 억지와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확장 억지만으로 북한의 행동양식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에서 남북 군사합의 선제적 조치, 선 핵동결, 체제 존중에 기초한 평화공존, 군사주권 확보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또한 북·중, 북·러 관계 발전을 고려한 중국과 러시아로 난 기회의 창도 열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8·15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의 절박성을 설파하고, 9월 러시아의 동방경제포럼, 11월 중국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한을 다자무대에 부르거나 적어도 간접적 대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때 잘 가다듬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창의적 정책 패키지를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한·미 동맹의 방기를 걱정하면서도 연루의 위험은 외면하고, 현실과 정책의 괴리가 드러난 완전한 북한 비핵화에 대한 집착이나 북한의 두 국가론이 우리 삶에 직결된다는 절박성의 부족이 이상주의가 아닌가. 최소한 우발적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정전체제의 대안을 모색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막기 위한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현실에 뿌리내린 실용외교의 기반이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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