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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동칼럼]정치, 승리의 기억을 버려라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이타카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밟은 땅은 떠날 때의 그곳이 아니었다. 궁에는 구혼자들이 들어앉아 남의 재산으로 잔치를 벌였고, 주인인 양 행세를 했다. 호메로스가 스무 권이 넘는 분량을 들여 묻는 것은 단순한 귀향의 여정이 아니다.

[정동칼럼]정치, 승리의 기억을 버려라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이타카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밟은 땅은 떠날 때의 그곳이 아니었다. 궁에는 구혼자들이 들어앉아 남의 재산으로 잔치를 벌였고, 주인인 양 행세를 했다. 호메로스가 스무 권이 넘는 분량을 들여 묻는 것은 단순한 귀향의 여정이 아니다. 돌아갈 곳이 이미 사라졌을 때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장면은 폭풍도, 괴물도 아니었다. 세이렌이었다.

세이렌을 관능적 유혹으로 기억한다면 원전을 잘못 읽은 것이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우리는 그대가 트로이에서 이룬 모든 일을 알고 있노라.”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노래한다. 그 섬에 뱃사람의 뼈가 쌓인 이유는 미지의 쾌락이 아니라 지나간 승리의 기억이었다. 사람을 난파시키는 가장 달콤한 소리는 언제나 한때 옳았던 자기 자신이다.

지금 우리 안에서 울리는 노래도 그렇다. 합당, 연대, 의리. 세 단어의 시제는 전부 과거형이다. 그런데 그 과거의 노래는 지금 누가 부르고 있는가.

정치를 논평하는 자리가 정치보다 강해진 지 오래다. 몇개의 마이크가 여론의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이 정치인의 명운을 가른다. 문제는 그 권력에 책임이 붙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선거로, 공직자는 감사로 심판받지만 평론은 심판받지 않는다. 틀린 예측을 열 번 해도, 어제와 정반대의 말을 오늘 해도, 다음주에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이들을 촉법 평론가라 부른다. 판을 흔들 힘은 어른의 것인데 책임을 물으려 하면 아무것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 옆에는 용역 평론가가 있다. 분석이 아니라 편을 파는 사람들이다. 결론이 분석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해석이 아니라 하청이다.

그래서 정치에도 VAR(비디오 판독)이 필요하다. 경기의 오심은 화면을 되돌려 바로잡지만 평론의 오심에는 되돌릴 화면조차 없다. 3년 전 발언을 스스로 확인하게 만드는 장치, 소수가 채널을 독점한 구조를 여는 비평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출연 총량제’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은퇴를 선언하고도 가장 큰 마이크 앞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책임만 골라 내려놓은 발언권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 노래에 붙은 제목이다. ‘노무현 정신’. 지난 3일 야당의 한 중진은 검찰개혁 방향을 겨냥해 이것이 노무현 정신이냐고 물었다. 안에서 정의하지 못한 개념은 반드시 밖에서 무기가 되어 돌아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결정적 장면은 하나같이 자기 진영이 반대한 선택이었다. 이길 수 있는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서 거듭 낙선한 것, 지지자들이 반발한 대연정을 제안한 것, 진보 진영 전체가 등을 돌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인 것. 평가는 갈려도 방향은 갈리지 않는다. 그는 진영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대통령이었다.

탈권위와 보통시민의 정치를 말한 이름이, 지금은 소수가 서로의 확신을 확인하는 명분으로 쓰인다. 그 이름을 가장 크게 부르는 쪽이 실은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떠나 있다. 계승이 ‘우리끼리 다시 뭉치자’로 번역되는 순간, 그것은 계승이 아니라 도용이다.

그사이 국정의 시계는 따로 흐른다. 국정 지지율은 43.3%, 부정 평가는 53.0%다. 세제개편안은 발표 나흘 만에 재검토 지시가 내려졌고, 서울 주택 착공은 연간 목표의 5분의 1에 그쳤다. 이 숫자 앞에서 할 말은 야당이 부당하다는 항변이 아니라, 야당이 옳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못해서 나온 숫자라는 인정이다. 나라가 퇴행하든 사회가 망가지든 이를 개의치 않는 정치가 가장 나쁜 정치다.

다시 오디세우스로 돌아간다. 목마를 설계해 전쟁을 끝낸 그는 서사시 속에서 그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계략이 진보가 아니라 탐욕에서 비롯됐음을 되새기며 괴로워한다. 이긴 자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서사시의 마지막도 복수가 아니다. 구혼자들을 몰살한 뒤 유족들이 창을 들고 몰려오자 신들이 개입해 지난 일을 잊으라고 명한다. 20년의 유랑과 하루의 학살 끝에 시인이 남긴 결론은 하나다. 되갚음으로는 아무것도 세울 수 없다. ‘기억’에 의존하는 정치가 이제는 ‘기대’의 정치로 변해야 할 때이다.

여당에 필요한 것은 진영의 복원이 아니라 성과의 축적이다. 이겼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해냈는지로 기억되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돌아간 곳은 20년 전의 이타카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돌아가려는 곳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이미 없다.

신인규 정당 바로 세우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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