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한국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일까. 혹은 동양화라는 이름은 오늘날 동시대 미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구미술관 개관 15주년 특별기획전 '서화무진(書畵無盡·When the Brush Moves, the World Continues)'은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
한국화는 한때 한국 미술의 중심 축이었지만 어느 순간, 동시대 미술 담론의 주변부로 밀려나 현재는 국공립미술관과 미술시장, 비엔날레 등에서 오래된 전통 혹은 특정 장르로 격하되며, 동시대 미술 담론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대구미술관 '서화무진'은 이런 현실 속에서 동양화에 내재된 수많은 질문과 변화의 가능성,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감각들을 동시대 미술의 시선으로 다시 꺼내 보였다는 지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 전통에서 동시대까지 아우르며 한국화의 현재를 모색하는 '서화무진'
'서화무진'전은 한국화의 흐름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현대화를 이루려 시도해 온 작고작가, 원로, 중진, 신진 작가들의 작품 200여 점을 총 8개 섹션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전시는 크게 1부 '붓이 움직일 때,'와 2부 '세상은 이어지고', 그리고 어미홀 '천지,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누었다.
먼저 1부는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성취를 시작으로 전통적 산수의 필묵이 현대적 풍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피는 △높은 산, 긴 물, 지·필·묵의 매체적 한계와 전통 서화의 관습을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해 온 시도들을 조명하는 △새로운 길, 가시적인 형상을 넘어 작가의 사유를 담아내는 '의경(意境)'의 세계를 탐구하는 △뜻 이르는 자리, 조선 후기 풍속화의 맥을 이어 이 땅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 세상의 풍경을 포착하는 △인간, 세상을 그리다 등이다.
2부 역시 4개 섹션으로 진행된다. 전통 산수화의 소재나 구도를 토대로 하면서도 현대 한국화의 '회화성'이 드러나는 현대의 진경들을 선보이는 △한국(회)화: 새로운 진경, 역사적 서사와 믿음의 체계를 적극적으로 소환하여 동시대의 시각에서 의문을 던지고 전복을 시도하는 작업들로 구성된 △소환과 갱신, 전통의 재료나 기법을 빌어 다양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감각으로의 회귀, 마지막으로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은폐되고 터부시되는 관습들을 모티브로 삼아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부수고자 하는 시도가 담긴 △뒤집어 보는 습속(習俗) 등이다.
'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그리고 어미홀 '천지, 근원에 대한 그리움'에서는 세대를 달리하는 네 명의 작가들이 철학적, 종교적, 관념적 고민을 반영한 세상의 풍경을 제안한다.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담아낸 각기 다른 풍경들이 모여 어미홀에서 조화롭게 펼쳐진다.
참여작가는 이상범, 이응노, 박생광, 김기창, 천경자, 이종상, 박윤영, 손동현, 김지평, 황규민 등 1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83명의 작가들이다. 이들의 꾸준한 모색과 탐구,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선들이 대구미술관 전시장에 폭넓게 펼쳐지고 있다.
'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전시를 기획한 대구미술관 이혜원 학예연구사는 "현대 한국화는 전통을 흡수하고, 차용 또는 도전하며 시대에 맞는 모색의 길을 걸어왔다. 전통과 현대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시대를 관통해 상호작용하는 흔적들로서 한국 현대미술 안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화의 면모를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이라고 말했다.
대구미술관 강효연 학예연구실장은 "대구미술관은 개관 15주년을 맞아 그동안 다져온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는 미술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하며, "K팝, K드라마, K푸드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요즈음 한국화를 중심으로 한 K아트는 세계미술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으며, '서화무진'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구시민 모두 놓치지 말고 전시를 봐주시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경. 황인옥 기자
◇ 주변에서 다시 중심으로…
국내 미술계에서 동양화 혹은 한국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전시를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화무진'이 가지는 의미는 깊다. 이번 전시가 국공립미술관은 물론이고,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도 한국화는 주변적인 위치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 흐름 속에서 오히려 한국화의 현재와 가능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동시대 미술 안에서의 새로운 확장 가능성까지 함께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단순히 전통 회화를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오늘날 한국화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확장되고 있는지, 그리고 동시대 미술 안에서 여전히 어떠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질문하는 드문 사례라는 점은 이번 전시가 가지는 생산적 의미이자 중요한 지점으로 읽힌다.
'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이번 전시에서 한국화를 하나의 고정된 양식이나 특정 재료 중심의 장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전시에는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다른 매체로 이동한 작가, 전통 재료를 유지하면서 내부의 변화를 시도한 작가, 한국화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동양적 감각과 사유를 사용하는 작가, 그리고 전통 기반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들을 모두 함께 배치하며, 한국화를 더 이상 먹과 종이의 경계를 넘어 감각과 사유, 재현 방식과 세계 인식의 문제로까지 확장해간다.
특히 전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제의식은 '동양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단순히 장르 명칭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한국 미술이 서구 중심의 미술 제도와 담론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서화무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서화무진'에서는 한국화가 더 이상 특정 전공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도 부각된다.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동양적 공간감이나 여백, 평면성, 비물질적 감각 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업 안에 끌어들는 동양화 비전공 작가들을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화가 하나의 제도적 장르의 국한에서 벗어나, 동시대 미술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변주될 수 있는 열린 감각 체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전시가 한국화를 하나의 정답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세대와 입장, 태도와 형식을 가진 작가들을 병치함으로써 한국화가 하나의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충돌하며 확장되는 과정 자체임을 보여준다. 이는 이번 전시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다.
전통과 현대, 수묵과 설치, 회화와 개념, 정신성과 감각 사이를 가로지르며 한국화의 현재를 새롭게 읽어내려는 대구미술관 '서화무진'전은 6월 14일까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