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전망부터 HVDC까지 수급 불안
한전 긴급 회의, 지체상금 면제 검토
전자업계도 비상 체제 계속, 재고 확보
이란 전쟁의 여파로 전선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리면서 국내 전력 인프라 구축 사업이 중단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한시적 휴전에도 불구하고 원자재 수급 불안이 여전하자 전선업계는 한국전력공사에 긴급 대응을 요청했으며,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국가 전력망 확충 사업 전반에 '도미노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10일 산업계에 따르면 중동 전쟁 여파로 원자재 수급 불안이 현실화 조짐을 보이자 전선업계가 한국전력공사에 긴급 대응을 요청했다. 이란 전쟁 여파로 원유 및 나프타 수급이 흔들리면서 전선의 핵심 자재인 피복재 공급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전선의 절연 및 피복층에 필수적인 폴리에틸렌(PE)과 폴리염화비닐(PVC)은 나프타를 기초 원료로 하며 이는 주로 전봇대 등 배전 케이블을 만들 때 사용된다. 현재 전선업계는 약 2개월 분량의 재고를 확보해 당장의 가동 중단은 피했으나, 전쟁이 고착화될 경우 원재료가 상승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생산량 감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2024년 1월 8일 인천 서구 신인천복합화력발전소 굴뚝에 전력 사용량 증가 등으로 인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사진 강진형 기자
미국과 이란이 2주간의 한시적 휴전 및 호르무즈 해협 개방에 합의했음에도 시장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특히 전선업계는 이란 내부에 위치한 주요 석유화학 단지의 가동률 저하나 운송료 상승 등 물류 리스크가 가중될 경우, 현재 진행 중인 배전망 구축을 비롯해 하반기 예정된 국가 전력망 확충 사업 전반까지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원자재 수급 지연으로 당장 영향 받고 있는 건 배전 업체들이다. 배전망용 케이블에는 나프타 기반 원자재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수급에 차질을 빚을 경우 변전소에서 건물, 공장, 데이터센터 등으로 전력을 보내는 배전망 공사도 중단될 우려가 있다.
한전에 따르면 전날 한전은 서울 서초동 한전 아트센터에서 '전선 수급 대책 회의'를 열고 LS전선, 일진전기 등 전선업체와 전선용 복합수지(컴파운드) 제조사들을 초청했다. 앞서 업체들은 한전에 주요 제품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며 대응을 요청했고 한전이 대책 마련을 위해 긴급 회의를 연 것이다. 한전은 납품 업체들에 공급이 지연될 경우 공사 지연에 따른 지체상금 부과를 면제하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국가 주도의 HVDC 사업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실제 한전은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 설계에 본격 착수하며 대규모 케이블 제조 입찰을 진행 중이다. 이 사업은 서해안의 신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핵심 프로젝트인 만큼, 원자재 수급 불능으로 인한 납기 지연은 국가 에너지 안보 문제로 직결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자재 수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국가 전력망 프로젝트 역시 도미노식으로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전선업계는 공급망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는 기존 단기 스폿(Spot) 계약 비중을 줄이고 1년 이상의 장기 계약(LTA) 비중을 확대해 수급 안정성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한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중동 및 유럽산 자재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및 동남아시아 등으로 공급선을 넓히는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구체화하며 전사적인 비상 대응 체제에 돌입했다.
한전 관계자는 "현재 원자재 재고를 3.2개월 분량 확보해둔 상태"라며 "나프타 수급이 중단되면 공사 납기가 지연될 수 있으니 지체상금 부과 면제 등 대응할 방침이며, 내년 이후 공사 발주 예정인 국가 송전망 프로젝트에는 아직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전쟁 휴전 소식에 전해졌지만 헬륨, 나프타 등 수급처인 반도체·가전 업계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업계는 전쟁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비상 체제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휴전이 이뤄지더라도 원자재 수급이 즉각 개선되거나, 수출대금 결제 전략을 조정하기에는 기간이 짧다"며 "아직 종전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을 예의주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가전업계 역시 휴전 기간 안전재고를 확보하고 물류 비용 추이를 주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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