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돈 전주문화원장
김제 부량면은 마한시대부터 벼를 지었기에 볏골로 불리다가 음차한 것이 벽골제가 되었다. 이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때 축조한 후 통일신라 때도 증축하였으며, 조선시대 때 저수지의 역사를 기록한 벽골제중수비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벽골제에 오르면 제방에는 장생거, 수유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 불리는 5개의 수문이 있었고, 현재도 장생거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고 많은 사람들이 수문을 보기 위하여 이곳을 찾는다. 요즘은 가을이 되면 노란 들판을 보기 위하여 오는 사람이 있고, 둑방에는 바람이 잘 불어 아이들이 연을 날리기도 한다.
고대 중국에서 물을 잘 다스리는 것은 국가의 중요 목표였다. 무더운 여름 황하강이 범람하면 많은 농토를 잃어버리고, 농민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치수에 온 정성을 다했으며, 하루는 요임금이 평복을 하고 민정을 살피는데, 한 노인이 밭두렁에서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를 불렀다. “해가 뜨면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 다리 뻗고 편히 쉬네. 우물을 파면 물이 펑펑 나오고, 밭을 갈면 곡식이 쑥쑥 자라니, 도대체 나에게 임금이 왜 필요할까?”라는 내용이다.
이때 요임금은 홍수 책임자로 순을 중용하자, 순은 자기 집을 지나가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치수에 혼신을 다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요임금은 아들 대신 왕위를 순에게 선양했던 것이다. 그러자 순임금 시대에도 백성들은 태평성대의 상징인 강구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임금의 덕을 높이 치하했다. 사실 요순시대는 치수와 정치를 잘해서 후대까지 태평성대로 부르고 있다.
임실 덕치에 가면 파출소 옆에 설보비가 서 있다. 이 비석은 병자호란 이후 1639년 대가뭄이 들자 운학 조평이 보를 막았던 곳이다. 그가 하루는 꿈을 꾸는데 ‘돌 사이로 눈이 녹은 자취를 따라 보를 막고 수로를 냈는데’, 이것을 마을 사람들과 협심하여 현실로 옮긴 인물이다. 이에 임실 회문리 일대의 관개시설로 인하여 농민들을 살찌우자, 후대 1879년 송사 기우만이 글을 지어 설보비를 세웠던 것이다.
조평은 의병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하여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초모도의사가 되어 의병과 군량미를 모집한 의병이었다. 선생은 전쟁 이후 농민들의 복지를 위하여 힘을 합쳐 설보를 축조하여 장장 20리의 수로를 낸 후 황무지를 옥토로 만든 공로는 덕치 회문산 지역의 큰 사건이었다.
또 순창 동계면 현포리에 가면 현포보수로 및 중건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이 현포리는 많은 땅이 있지만 물길이 닿지 않아 황폐화되어 있었다. 이에 영조 12년(1736)에 참판 김원보와 김언립은 이곳 주민들을 동원하여 보를 축조하여 당시 가뭄이 들면 흉년이 들던 것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보를 어떻게 설치하라고 알려주었기에, 그대로 하였더니 물이 넉넉하여 벼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고, 나중에 물레방아 방앗간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상류에서 산을 깍아 2,606m의 물을 끌어와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에 주민들은 그 은혜를 갚고자 수로의 중간에 작은 비석을 세워 공들의 시혜를 남겼던 것이다.
필자는 몇일전 마을 분과 함께 수로를 따라 적성강을 거닐며 현포보수로 및 중건불망비를 참견했는데, 그 당시 물을 얻기 위하여 산을 깍고 바위를 치고 했던 노력이 대단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후에 새워진 황윤현이 보를 수리한 공적비도 함께 있었다.
옛날에는 농사를 지을 때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수리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물 걱정이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만경강이 흐르는 전주의 전미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미동의 넓은 들에 하늘만 바라보고 물을 대는 것이 딱딱 맞지 않았고, 쌀을 찌는 물레방앗간을 돌리려면 소양천에서 몇km 수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에 전당리 김옥동이라는 사람은 마을을 다니면서 쌀을 십시일반 걷어, 그 당시 전주 수리조합을 찾아가 저수지를 만들어 달라고 계획서를 냈다. 이에 백석저수지 타당성 조사는 이루어졌고, 작은 철로를 놓아 흙을 나르고 대규모 공사를 시행하여, 오늘날 철새들의 안식처인 백석저수지가 된 것이다.
백석저수지 둑방에는 치수공덕김옥동기념기가 있다. 여기에는 저수지를 축조할 때 공덕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 120명 이상 적혀져 있다. 이후 백석저수지를 막자 그 아랫마을 사람들은 물이 풍족하여, 벼농사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고, 이때부터 전당리와 미산리 사람들은 물 걱정이 없었다.
김옥동의 업적은 전당리와 미산리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마을의 물레방앗간이 풍덩풍덩 돌아가고, 점점 사람들의 얼굴은 생기가 넘쳐났던 것이다. 이에 그가 운명하자 산소로 가기 직전 김옥동기념비에 가서 노제를 지냈다가 전한다.
백석저수지는 원래 동쪽 야산에 반짝반짝하는 흰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35사단 장병들이 화단을 정비한다고 중장비를 가지고 와서 모두 가져가는 통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전한다. 지금은 백석저수지 남쪽으로 에코시티가 조성되면서 산책로와 새를 조망하는 시설이 잘 조성되어 있다. 꽃향기를 맞으며 밤나무길과 버드나무 군락지 테크를 한번 걸어보기를 권한다. 물론 위에 열거한 설보비와 현포수로비, 그리고 김옥동공적비도 한번 보기를 권한다.
김진돈 <전주문화원 원장>
김진돈 전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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