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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라 Insight]이동통신 가입자가 인구보다 많은 나라

정보통신 분야에서 반도체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2024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마트폰 브랜드 10개 중 6개가 애플, 4개가 삼성이었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매출액 기준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전라 Insight]이동통신 가입자가 인구보다 많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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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어떤 경로를 거쳐 선진국으로 도약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1890년대 구한말로 돌아가 보자.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자리,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독일회사 세창양행이 둥지를 틀었다. 유럽의 앞선 문물을 중국에 중계하던 회사가 미개척지 조선의 가능성을 보고 인천에 진출했고, 인천-한성 간 전화 연결 사업을 맡았다. 1896년 10월 공사를 마무리했고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를 처음 가설했다. 그 전화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고종이었다. 사흘 뒤 다시 인천으로 전화를 건 고종은 명성황후 암살범으로 보이는 일본군 중위를 응징하고 인천 감옥에 붙잡혀 있던 김창수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고 했다. 고종의 전화 한 통으로 목숨을 건진 이가 훗날의 백범 김구 선생이다. 최초의 공중전화는 1902년 개통됐는데 한성과 인천 간 전화 한 통에 50전, 당시 쌀 5가마니(400㎏)에 해당했다.

해방 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통신 후진국이었다.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통신 인프라 구축은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1970년대의 전화 가설은 신청 후 몇 달이 지나야 가능했고, 당시 전화기 한 대(260만 원)가 서울의 50평대 집 한 채(230만 원)보다 비쌌다. 전두환 정부에서 지멘스 교환기를 국산 교환기로 대체했다. 체신부의 전화기 배급제를 폐지했고, 생산과 판매를 업체 간 경쟁에 맡겼다. 그 결과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유선전화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섰고 전화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한국이동통신이 공기업 한국통신의 자회사로 출범한 게 1984년이다. 삼성이 핸드폰(SH 100)을 처음 만들었던 1988년도의 국내 핸드폰 판매 1등은 모토롤라였고, 2등은 노키아, 3등이 삼성이었다. 모토롤라의 시장 점유율은 70%로 압도적이었다. 3위 삼성이 핸드폰 시장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한 게 1996년이다. 그해에 삼성은 핸드폰 수출을 시작했고, 국내 점유율 1위(47%)를 차지했다. 이처럼 한국의 이동통신 서비스업과 제조업은 시너지효과를 주고 받았다.

1990년대의 이동통신 경쟁 활성화 정책은 어떤 경로를 거쳐 파급효과를 초래했을까? 첫째, 가입자 급증이다. 한국이동통신 1사 체제로 시작한 1984년도에 가입자 수는 2,658명에 불과했다. 1987년 1만 명, 1990년 8만 명, 1993년 47만 명. 이처럼 완만하게 증가하다가 1994년과 1996년 두 차례에 걸친 경쟁 활성화 정책으로 가입자가 폭증했다. 1995년 164만, 1996년 318만, 1997년 687만, 1998년 1,401만, 1999년 2,344만으로 늘어, 1999년 한 해에만 943만 명이 순증했다. 2002년 3,234만 명부터 2024년 8,922만 명까지 해마다 250만 명가량 증가했다. 인구 100명당 가입자는 162.1명, 인구보다 가입자가 1.62배 많다.

둘째, 매출액 증가다. 이동통신 가입자의 급증은 매출액과 시장 규모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동통신 시장 전체의 매출액이 1993년 2,146억 원에서 1999년 9조 1,176억 원으로 6년 동안 42.5배 증가했다.

셋째, 단말기 가격과 서비스 요금의 하락이다. 1984년의 차량용 이동통신 단말기(카폰)가 331만 원으로 당시 차량 1대 가격에 버금갔지만, 지금은 컴퓨터와 비슷한 성능의 스마트폰이 100만 원 안팎이다. 알뜰폰 등 보급형 단말기는 훨씬 저렴하여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동통신 가입비용은 1996년 70만 원에서 1998년 이후 2만 원으로 크게 내려갔으며, 선택요금제, 보증금 폐지, 이용시간과 사용량에 따른 추가 혜택 등으로 이용 부담이 크게 가벼워졌다. 스위스 통신공사(BAKOM)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이동통신 서비스 요금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저렴한 수준에 속한다.

넷째, 단말기 제조업체의 경쟁력 제고다. 이동전화 단말기의 수출 추이를 보면, 1990년 약 1.4억 달러에 그쳤던 수출액이 2008년 334.4억 달러까지 급증했다. 2010년 애플의 ‘아이폰 쇼크’ 이후 컴퓨터 기능을 탑재한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었고, 원가 절감을 위해 베트남과 인도로 공장을 이전한 후 수출액이 주춤했다. 그래도 2025년 기준 스마트폰 수출액은 143.5억 달러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반도체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2024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마트폰 브랜드 10개 중 6개가 애플, 4개가 삼성이었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매출액 기준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점유율은 애플 46%, 삼성 15%, 샤오미 6%였다.

이처럼 1990년대의 이동통신 경쟁 활성화 정책은 5개 회사 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서비스 경쟁력을 제고시킴은 물론 가치사슬로 연결된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장비 제조업체들, 콘텐츠업체들에게도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경쟁 활성화를 통해 서비스 시장의 확대, 서비스 품질의 개선과 요금 인하, 스마트폰 제조업의 경쟁력 제고 등 의도한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1990년대의 이동통신 경쟁 활성화 정책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태우 정부의 1992년 제2 사업자 선정은 실패했고, 김영삼 정부의 1994년과 1996년 두 차례에 걸친 경쟁 활성화 정책은 성공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먼저,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에 시도된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국내 통신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시장개방 압력에 선제 대응한다는 취지로 시작됐고, 목표 설정과 선정 절차도 문제없었다. 단,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 다른 부처와 여당에서도 선정 시기를 미루자는 의견이 많았고 정치적 지지가 부족했다. 결국, 정해진 요건과 절차를 거쳐 선정된 사업자가 1주일 만에 스스로 사업권을 반납해버렸다. 크게 3가지가 문제였다. 임기 말에 논란 많은 정책을 추진했으며, 대통령과 사돈 관계인 기업이 선정됐으며, 주파수 경매가 아닌 사업계획서 심사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공정성 논란을 더 키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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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은 김영삼 정부는 전임 정부의 실패를 딛고 성공했다. 임기 초인 1993년에 정책 방향을 제시했고, 1994년에 이해관계자인 전경련을 끌어들여 컨소시엄 구성을 일임했다. 정부의 책임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사업자 선정과정과 사후의 논란을 최소화했다. 1996년의 PCS(개인휴대통신) 3사 선정은 과당경쟁의 우려를 낳았지만, 유선통신회사, 통신장비제조업체, 통신서비스업체, 중소기업 등으로 사업권을 안배하면서 정치적 지지를 유지했다.

요컨대, 1970년대까지 통신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가 50여 년 만에 통신 선진국으로 도약한 비결은 뭘까? 1980년대의 교환기 국산화, 전화 배급제 폐지, ETRI(전자통신연구소) 신설, 이동통신 독자 기술(CDMA 방식)의 채택 등도 일조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계기는 1990년대의 개방과 경쟁 정책이었다. 특히, 김영삼 정부는 미국과 유럽의 통신시장 개방 요구에 맞서 과감하게 열었고 경쟁을 활성화했다. 그것이 주효했다.

정책에는 완벽한 실패도 완벽한 성공도 없다. 성공한 정책이 오래 지속된다는 법도 없다. 1996년 이후의 5사 경쟁체제는 2002년 이후 구조조정을 거쳐 3사(SKT, KT, LGU+) 체제로 축소됐다. 2008년부터 가계 통신비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제4 이통사업자 허가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다수의 별정통신 사업자(MVNO, 알뜰폰 사업자)들이 등록하도록 해 가격 경쟁을 유도하고 있음은 다행이지만 차선책이다.

김동열(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전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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