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부산포에 왜군의 함선이 몰려들던 날, 전주 사람들에게도 전쟁 소식은 불길처럼 번져갔다.
‘한양이 위태롭다, 왕이 피난을 떠났다’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까지 밀려 내려온다’는 소문이 장터와 사랑방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소문 속에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위기가 숨어 있었다. 조선 2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적어 둔 책, 조선왕조실록이 전란 속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였다.
그 당시 조선왕조실록은 한양 춘추관을 포함해 네 곳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고 왜군이 북상하면서 충주와 성주에 있던 실록은 잇따라 불타거나 약탈당했다.
전쟁의 화마는 기록을 가리지 않았고, 왕조의 기억과 국가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실록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신세가 됐다.
그러는 사이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에도 서서히 비상이 걸리기 시작한다.
전주사고를 지키던 관리들과 전북의 선비들은 누구보다 먼저 이 변화를 감지했다. “한양도 위험하다 하지 않는가. 충주와 성주가 그렇게 됐다면, 전주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실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전쟁의 폭풍이 이곳까지 밀려오리라는 불안감이 뒤섞인 대화가 전주의 관아 마당과 서원, 사랑방을 오갔다.
이 위기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의 이름이 조용히 역사 앞에 나서게 된다. 전주 지역 유생 안의와 손홍록이었다.
젊은 선비였던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그냥 두고 피난길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왕과 조정이 남긴 지난 날의 치욕과 성취, 반성과 교훈이 담긴 책을 잃어버리면 나라가 다시 일어서도 역사의 기억은 되찾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실록은 단지 종이 더미가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조선의 ‘정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 실록을 전주에서 빼내어 더 깊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자는 어찌 생각하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태조부터 중종에 이르는 방대한 실록이 쌓여 있었다.
이 책들을 한 번에 옮긴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삿짐 전쟁’을 치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나르는 순간 들킬 수 있고, 길에서 왜군을 만나면 그대로 약탈당하거나 모두 불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의와 손홍록은 오히려 그 위험 때문에라도 더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선택한 피난처는 전주에서 멀지 않은 내장산 일대의 깊은 산골이었다. 험하고 좁은 산길을 따라야만 닿을 수 있는 암자와 토굴 같은 공간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눈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전주와의 거리상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곳, 바로 그 지점이 ‘실록 이안’의 은신처가 되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이들은 주변의 뜻 있는 이들과 손을 잡고 실록 옮기기 준비에 나섰다.
밤이 깊어질수록 전주사고 안팎은 더 분주해졌다.
어둠을 틈타 실록을 꺼내며 이들은 책 한 권 한 권을 광주리와 멍석, 천 보자기에 곱게 싸서 말 등에 올렸다.
소리를 죽인 채 나무로 만든 상자를 들어 올리는 손에선 땀이 흘렀지만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이 책이 타버리면, 우리 후손들은 한 번도 세상을 겪어보지 않은 아이처럼 눈먼 역사를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이, 어쩌면 그날 밤 가장 무거운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주를 빠져나간 실록 행렬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이 적은 길을 택해 내장산 쪽으로 향했다.
낮에는 인가 근처를 피해 숲과 골짜기 길로 돌아가고, 밤이 되면 조심스레 마을과 들판을 스쳐 지나갔다.
가는 길마다 비와 흙먼지가 뒤섞였고, 말발굽 아래 진창길이 이어졌지만, 실록을 싣고 있는 짐만은 거듭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혹여나 떨어지거나 젖지는 않았는지, 묶은 끈은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가는 내내 모두의 눈은 책 더미에 고정돼 있었다.
내장산 자락에 다다랐을 때, 그들이 얻은 것은 안도감이 아니라 또 다른 긴장이었다.
깊고 험한 산속이라 왜군의 눈은 피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스스로 지키고 버텨야 하는 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왕과 조정이 어디에 있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실록을 지키는 일은 곧 ‘긴 기다림’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산중 암자와 토굴 같은 공간에 실록을 숨기고, 비밀을 아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길을 택한다.
세월은 그때보다 훨씬 많이 흘렀고,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서점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펼쳐 볼 수 있는 이유, 학자들이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때 전주에서 출발한 이 ‘실록 이안’ 덕분이다.
충주와 성주의 실록이 모두 전란으로 사라진 뒤, 온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것은 전주사고본이 사실상 유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실록을 다시 정리하고 인출하는 작업도, 전주에서 지켜낸 그 책들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장수도 아니고, 전장을 누빈 영웅의 이름도 아니지만, 이 길에 서린 이야기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억’을 지켜낸, 또 다른 구국의 서사이다. 한산도 바다에서 이순신이 나라의 바다를 지켰다면, 전주의 선비들은 내장산 산골에서 나라의 역사를 지킨 셈이다.
임진왜란은 결국 조선에게 참담한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다.
수많은 성이 무너지고, 숱한 마을이 불탔으며 사람들의 삶은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렇지만 그 폐허 한가운데서도 어떤 이들은 칼 대신 책을 들고, 몸 대신 기록을 먼저 숨겼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옮긴 안의와 손홍록, 이름도 제대로 남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손과 발이 바로 그 증거이다.
만약 그때 전주사고 실록이 그대로 불타 올랐다면, 우리는 지금 조선 전기 200년의 역사를 훨씬 빈약한 조각들로만 짐작해야 했을 것이다.
왕조의 흥망과 치욕, 간신과 충신의 얼굴, 전쟁과 외교의 뼈아픈 기록들도 상당 부분 영영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북 땅에서 시작된 이 실록의 피난길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상 앞에 당당히 서게 됐다.
역사가 후대에 남겨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날 밤 실록을 등에 지고 산길을 올랐던 이름 없는 이들에게 건네는 늦은 감사 인사일지도 모른다.
전쟁터도, 왕궁도 아닌 전북의 한 사고와 산골에서 시작된 이 기록의 여정은, 결국 “나라가 어려울 때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그 질문에 대한 선비들의 대답은 분명했다. “총과 칼이 끝난 뒤에도 남아야 할 것, 바로 역사의 기록이다.” 전주에서 내장산까지 이어지는 그 길 위에서, 430년 전 역사와 현재가 조용히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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