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반 뷰티·건강기업’ 내건 이선주 대표
중국시장 중심 ‘더후’ 원톱구조 흔들
샴푸·치약 넘어 ‘두피·오랄케어’방점
북미·일본 영토 확장, 리빌딩 ‘시험대’
뷰티 디바이스, 차세대산업 급부상
LG전자서 프라엘 이관, 본격 진입
‘다시 젊어질 수 있느냐’가 성패 관건
LG생활건강은 현재 다소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K뷰티의 역사이자 원조로 불리던 이 회사만큼 오래된 뿌리를 가진 기업도 드물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 K뷰티 열풍을 대변하는 1등 기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화장품 수요는 커지고, 신흥 브랜드들은 가벼운 몸집으로 아마존·틱톡숍·올리브영·쇼피를 넘나들고 있다.
반면에 LG생활건강은 한때 100만원을 넘던 ‘황제주’였어도 이후에는 20만원대 주가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 뷰티 사업의 부진과 중국 시장 의존의 후폭풍을 동시에 견디고 있다. 과연 새로운 돌파구는 없는 걸까?
LG생활건강의 출발은 럭셔리가 아니었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에서 시작된 이 회사의 뿌리는 국민 생활을 바꾸는 제품에 있었다. 럭키크림과 럭키치약은 수입품과 분말 제품에 기대던 시장에서 국산 생활소비재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비누, 세제, 샴푸, 치약, 화장품으로 이어진 브랜드들은 우리의 욕실과 세탁실, 화장대에 깊숙이 들어갔다. 이 회사의 강점이야말로 매일 쓰는 제품을 신뢰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힘은 오랜 기간 LG생활건강의 무한 경쟁력이 됐다. 페리오, 엘라스틴, 피지, 테크 같은 생활용품 브랜드는 경기 변동과 무관하게 반복 구매를 만들어냈다. 오휘, 숨37°, 빌리프, 피지오겔, CNP는 화장품 영역에서 포트폴리오를 넓혔다. 지난 2009년엔 더페이스샵을 시작으로 2014년 CNP, 2017년 태극제약, 2019년 뉴에이본, 2020년 피지오겔 아시아·북미 사업권, 2021년 보인카, 2022년 더크렘샵 인수를 해가며 거침없이 성장했다. 여기에 코카콜라음료와 해태음료 인수는 음료 사업을 안정적 캐시카우로 만들었다.
‘더 후’ 매출, 9년전으로 후퇴
그러나 이러한 성공 공식은 종종 다음 위기의 원인이 됐다. LG생활건강의 전성기를 만든 핵심 브랜드는 ‘더 히스토리 오브 후’였다. 2003년 출시된 더후(THE WHOO)는 한방 콘셉트와 고급화 전략을 결합해 중국 시장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13년 2037억원이던 더후 매출은 2014년 4310억원으로 두 배 이상 커졌고, 2018년에는 국내 화장품 브랜드 최초로 연매출 2조원을 넘었다. 문제는 이 성공이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회사의 뷰티 사업은 어느 순간 여러 브랜드의 조합이 아니라 더후 중심의 원톱 구조로 굳어졌다.
코로나19 이후 그 구조가 흔들렸다. 팬데믹과 중국 소비 둔화, 현지 브랜드 선호 확산이 겹치면서 급격히 약화됐다. 지난해 더후 매출은 전년 대비 4500억원 줄어든 1조1021억원에 머물렀고, 사실상 9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 지난해 LG생활건강 전체 화장품 매출의 절반가량이 여전히 더후에서 나왔다는 점은 위기의 본질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더후가 무너지자 뷰티 포트폴리오 전체가 동시에 흔들린 것이다.
숫자는 냉정했다. LG생활건강의 지난해 연결 매출은 6조3555억원, 영업이익은 1707억원이었다. 전년 대비 매출은 6.7%, 영업이익은 62.8% 감소했다. 뷰티 부문은 연간 매출 2조3500억원, 영업적자 976억원을 기록하며 회사 전체 실적 악화를 주도했다. 2021년 1조2000억원대였던 영업이익이 지난해 1707억원까지 줄었다는 것은 단순한 경기 부진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더구나 당기순이익은 적자로 돌아섰고, 주가는 2021년 고점 대비 크게 하락했다.
이선주 LG생활건강 대표
외형지키기보다 체질개선 선택
이때 드러난 또 하나의 부담은 과거 공격적이었던 M&A의 후폭풍이다. 북미 공략을 위해 인수했던 더에이본컴퍼니, 더크렘샵, 보인카 등은 기대만큼 빠르게 실적 기여를 하지 못했고, 영업권 손상이라는 이슈도 터졌다.
회사는 2022년 더에이본컴퍼니 영업권을 전액 손상 처리했고, 이후에도 손실을 반영했다. 팬데믹 기간 누적된 재고도 실적을 압박했다. 연결 기준 재고자산은 2021년 1조원 이상으로 늘었다가 지난해 8324억원까지 감소했지만, 그 과정은 결국 구조조정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 LG생활건강의 리빌딩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과거의 부실을 정리하는 일이면서 다른 하나는 미래의 성장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LG생활건강은 지난 2023년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 이후 지난해 말까지 네 차례의 인력 효율화가 진행됐고, 면세점·백화점 등 전통 오프라인 채널에 맞춰져 있던 인력과 유통 구조도 손질됐다.
국내 면세 물량 조절, 오프라인 매장 효율화, 브랜드 건전성 회복 작업은 단기 매출에는 부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불가피한 수술에 가깝다. LG생활건강은 지금 외형을 지키기보다 체질을 바꾸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이 수술의 집도의가 이선주 대표다. 로레알코리아 출신인 그는 키엘, 입생로랑, 메디힐, AHC 등 다양한 브랜드를 다뤄온 마케팅형 CEO로 평가받는다. 특히 키엘을 약국 브랜드의 성분 신뢰와 프리미엄 유통 전략으로 키워낸 경험은 지금 LG생활건강이 필요로 하는 역량과 맞닿아 있다. 이 대표가 취임 이후 제시한 방향은 명확하다. 브랜드 포트폴리오 재편, 고객경험 혁신, 고성장 지역 집중 육성, 수익성 구조 재조정이다. 이는 재무적 비용 절감만이 아니라 브랜드를 다시 팔리는 구조로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조직 개편도 이 방향을 따른다. LG생활건강은 기존 뷰티사업부와 HDB사업부를 럭셔리뷰티, 더마&컨템포러리뷰티, 크로스카테고리뷰티, 네오뷰티, HDB 등 5개 조직으로 재편했다. 여기서 핵심은 닥터그루트와 유시몰을 HDB에서 떼어내 네오뷰티로 편성한 점이다. 두 브랜드는 생활용품과 뷰티의 경계에 있는 제품이다.
과거에는 샴푸와 치약의 연장선처럼 보였지만,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는 두피케어와 오랄케어가 뷰티·웰니스의 고성장 카테고리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 대표가 고른 싸움터는 더마(Der ma·피부과학), 두피케어, 오랄케어, 비건, 뷰티 디바이스다. 모두 기능성과 과학적 근거, 반복 사용, 프리미엄화 가능성이 결합된 영역이다. 이는 LG생활건강의 원래 DNA와도 맞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유행성 색조 브랜드보다 생활 속 반복 구매 제품에 강했다.
다만 과거의 반복 구매가 치약과 세제 중심이었다면, 앞으로의 반복 구매는 기능성 앰플, 두피케어 샴푸, 프리미엄 치약, 홈케어 디바이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LG생활건강이 올해 경영 목표로 내건 ‘과학 기반 뷰티·건강 기업’이라는 방향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히트상품 중심 마케팅 ‘속도전’
북미 전략은 이러한 리빌딩의 시험대다. 닥터그루트는 북미 코스트코 682개 전 매장에 입점했고, 올해 2월 세포라 온라인몰에 공식 입점한 데 이어 오는 8월부터 미국 전역 400여개 세포라 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CNP는 미국 최대 화장품 유통업체 얼타뷰티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들어갔다. 빌리프 역시 얼타뷰티에서 판매되고 있고, 더페이스샵은 지난해 하반기 미국 대형마트 체인 타깃 1800여개 매장에 입점했다. 과거 중국 면세점이 단일 대형 통로였다면 지금은 아마존·코스트코·세포라·얼타·타깃이라는 다중 채널로 소비자 접점을 넓히는 방식이다.
성과의 조짐도 있다. 2026년 1분기 LG생활건강의 연결 매출은 1조5766억원, 영업이익은 1078억원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7.1%, 24.3% 감소했지만, 전 분기 대비로는 매출이 7%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흑자 전환했다. 영업이익률도 지난해 4분기 -4.9%에서 올해 1분기 6.8%로 개선됐다. 지역별로는 중국과 일본 매출이 각각 14.4%, 13.0% 줄었지만 북미 매출은 35% 증가했다. 아직 전체 해외 매출 증가율은 0.9%에 그쳤지만 적어도 성장 방향이 중국 일변도에서 북미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는 확인된다.
다만 이 숫자를 곧바로 턴어라운드로 읽기에는 이르다. 뷰티 부문 1분기 매출은 7711억원으로 전년 대비 12.3%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386억원으로 43.2% 줄었다. 면세 물량 조절과 오프라인 매장 효율화, 마케팅 투자 확대가 동시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은 비용을 줄이지만, 브랜드 재건은 다시 투자 비용을 요구한다. LG생활건강은 지금 수익성을 회복해야 하는 동시에 새 시장에 브랜드를 심어야 하는 어려운 구간에 있다.
그럼에도 과거와 달라진 점은 분명하다. 예전 LG생활건강의 글로벌 전략은 더후라는 대형 브랜드를 중국 고급 소비층과 면세 채널에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다. 지금의 전략은 닥터그루트, CNP, 빌리프, 더페이스샵, 유시몰, VDL, 피지오겔, 프라엘을 지역별·채널별로 나눠 배치하는 방식이다. 중국에서는 피지오겔, 닥터그루트, 유시몰을 티몰과 샘스클럽 중심으로 키우고, 일본에서는 VDL과 CNP, 유시몰을 드럭스토어·코스트코·큐텐·엣코스메로 확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LG생활건강이 더 이상 모든 브랜드를 같은 방식으로 키우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로벌 6대 브랜드와 지역 성장 브랜드를 구분하고, 히트 제품 중심으로 마케팅 자원을 집중하려는 흐름이 보인다. 과거 대기업식 포트폴리오 확장이 많은 브랜드로 밀어부쳤다면, 지금의 K뷰티 시장에서는 시장에 빠르게 반응하는 게 관건이다.
실제 신흥 K뷰티 기업들은 작고 민첩한 조직으로 틱톡, 아마존, 올리브영, 인플루언서 채널을 빠르게 타고 성장한다. LG생활건강이 전략센터를 통해 의사결정 단계를 줄이고 조직을 세분화한 것도 이 속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다음 승부처는 뷰티 디바이스다. K뷰티의 경쟁은 화장품 용기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홈케어 기기, 피부 측정, 고주파·LED·갈바닉 기술, 맞춤형 케어가 결합되면서 뷰티 디바이스는 차세대 성장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6월 LG전자로부터 프라엘을 이관받으며 이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 프라엘은 2017년 LED 마스크로 시장 대중화를 이끈 브랜드이고, 현재도 연간 1500억~2000억원 수준의 매출을 기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라엘은 LG생활건강에 상징적인 자산이다. 화장품 회사가 디바이스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LG그룹의 전자 기술과 생활건강의 뷰티 브랜드 운영 역량을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시한 ‘LG프라엘 수퍼폼 갈바닉 부스터’는 미국 아마존과 틱톡샵에 입점했고, 아마존 ‘핫 뉴 릴리즈’ 주름·안티에이징 디바이스 부문 1위를 기록했다.
아직 시장 주도권은 에이피알이 강하게 쥐고 있지만, LG생활건강이 디바이스를 단순 신사업이 아니라 과학 기반 뷰티 전략의 한 축으로 삼는다면 프라엘은 재건의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이익잉여금 등 향방 주목
자본 여력도 변수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말 기준 별도 기준 4조2306억원, 연결 기준 5조5403억원의 이익잉여금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순손실로 배당 여력이 약해졌고 배당수익률도 낮아졌지만, 이익잉여금과 자사주는 여전히 전략적 선택의 여지를 만든다. 회사는 2027년 말까지 보유 자사주 전량을 소각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올해 1분기에도 보통주 31만5739주, 804억원 규모의 기취득 자사주 소각 계획을 공시했다. 시장이 보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이 자금이 빠르게 성장하는 인디 브랜드 인수나 포트폴리오 보강에 쓰일 수 있느냐다.
LG생활건강의 앞으로 2~3년은 그래서 패자부활전이 아니라 체질 검증의 시간에 가깝다. 이 회사는 이미 충분히 큰 기업이다. 따라서 더 커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다시 젊어질 수 있느냐에 따라 성장 가능성이 있다. LG생활건강은 지금 소비자가 가진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탈모와 두피, 피부 장벽, 구강 케어, 홈케어 디바이스, 웰니스, 성분 신뢰, 디지털 구매 경험이 그 문제들이다. 이선주 체제의 성패는 결국 여기에 달렸다. LG생활건강의 리빌딩은 다시 한 번 소비자의 일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로 판가름 날 것이다.
- 김기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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