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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종욱·반기문 이후 20년…WHO 수장, 대한민국이 도전할 때 [김록호의 글로벌 보건·의료]

한국에서 세계로 뻗어 나가는 연결망을 중심으로 AI와 의료·바이오 기술, 국제 보건 협력을 형상화한 AI 이미지. 차지호 의원과 고(故)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상징적으로 배치했다.

김록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객원교수

한국에서 세계로 뻗어 나가는 연결망을 중심으로 AI와 의료·바이오 기술, 국제 보건 협력을 형상화한 AI 이미지. 차지호 의원과 고(故)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상징적으로 배치했다.

지난 주말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선거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지난 금요일 벨기에가 한스 클루게 WHO 유럽지역사무처장을 후보로 내세운 데 이어, 주말에는 인도네시아가 부디 구나디 사디킨 보건장관을 공식 후보로 내세웠다. 이미 출마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하난 발키 WHO 동지중해지역사무처장과 카타르의 하난 알쿠와리 전 보건장관까지 합치면 네 명이다.

그리고 바로 이번 주, 그 첫 대회전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벌어졌다. 지난 24일부터 WHO 아프리카지역총회 관련 고위급 일정이 시작돼 47개 아프리카 회원국의 보건 지도자들이 모였다. 내년 1월 사무총장 후보를 최대 3명으로 압축할 WHO 집행이사회 34개국 가운데 아프리카 국가가 7석을 차지한다. 네 후보와 지지국들이 아프리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뛰는 이유다. 한국의 후보인 차지호 더불어 민주당 국회의원도 아디스아바바에서 국제사회와 접촉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급박한 움직임을 보며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대한민국은 이번에도 세계의 움직임을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미 두 번의 경험이 있다. 2003년 이종욱 박사가 WHO 사무총장에 도전했을 때 한국은 국제기구 선거의 강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와 외교관들이 힘을 모았고 마지막 투표에서 17대 15로 승리했다. 한국인 최초의 유엔 전문기구 수장이 탄생했다. 2006년에는 정부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도전을 지원해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승리가 보장됐기 때문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다. 도전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생겼고, 대한민국이 함께했기 때문에 역사가 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기술력, 문화적 영향력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러나 주요 유엔 체제 국제기구 31곳의 현 수장을 살펴보면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국제사회에 상당한 재정적 기여를 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대한민국의 위상에 비춰 볼 때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선도국가’는 경제 규모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규칙과 표준을 만들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책임 있는 자리에 얼마나 참여하느냐도 중요하다.

물론 국제기구 선거는 어렵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외교적 자원도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익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당선 가능성이 확실해진 뒤에 후보를 내는 국제기구 선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력 있는 후보를 찾아 세계에 내놓고, 외교를 통해 가능성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가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더욱이 지금 WHO는 단순한 보건기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다음 팬데믹과 기후변화, 항생제 내성, 전쟁과 난민, 고령화와 만성질환이라는 복합 위기를 맞고 있다. 동시에 AI는 진단과 신약 개발부터 질병 예측과 보건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바꾸고 있다. AI의 안전과 윤리, 데이터와 국제표준을 누가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는 앞으로 수십 년간 인류의 건강과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은 세계에 내놓을 이야기가 있는 나라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공여국으로 성장했고, 전 국민 건강보험을 달성했으며, 세계적인 의료·바이오·디지털 기술을 갖췄다. 선진국의 과학기술과 개발도상국의 현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드문 경험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AI 시대의 선도국가’가 구호에 머물지 않으려면 바로 이러한 국제규범을 만드는 무대에서 책임을 맡아야 한다.

WHO 사무총장 선거 역시 특정 개인의 정치적 진로로 봐서는 안 된다. 누가 어느 당에 속했는가보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국제기구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일만큼은 국내 정치의 진영 논리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해본 나라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할 때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가난했고 국제적 영향력도 작았다. 그러나 국가적 목표 앞에서는 정부와 기업, 외교관과 국민이 힘을 모았다. 서울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세계가 대한민국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국제기구의 최고 지도자를 배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는 정권의 성과도, 어느 정당의 승리도 아니다. 성공한다면 대한민국 전체의 자산이 된다.

지금 경쟁에 나선 후보들은 모두 훌륭하다. 그러나 한국에도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경쟁할 만한 후보가 있다. 차지호 의원은 의사이자 국제보건 연구자로서 분쟁과 재난의 인도주의 현장을 경험했고, WHO와 함께 일했으며, 기후변화·이주·AI와 미래사회를 연구해 왔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 정당의 국회의원이냐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에 내놓을 만한 인물이냐는 것이다. WHO에서 지난 20년간 세계 여러 나라의 보건 지도자들과 함께 일한 경험에 비춰 볼 때, 그가 충분히 경쟁해 볼 만한 후보라고 생각한다.

이종욱도, 반기문도 처음부터 당선이 확실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가 먼저 가능성을 믿고 세계를 설득했기에 길이 열렸다.

지금 아디스아바바에서는 이미 네 후보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WHO 사무총장 후보 추천 마감일은 오는 9월 24일이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세계의 규칙을 잘 따르는 나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의 규칙과 미래를 함께 만드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그 길에서는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20년 만에 우리에게 다시 문이 열리고 있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그 문 앞에서 돌아서지 않았으면 한다.

김록호의 글로벌 보건·의료

He is...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보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교수와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겸임 조교수를 역임했다. WHO 유럽환경보건센터, 남태평양사무소, 서태평양지역사무소 등에서 근무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WHO 본부 과학부에서 표준·방법론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장을 지냈다. WHO에서 약 20년간 활동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지구건강연구소 객원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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