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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런생각]당신의 여우와 말은 누구?

요즘 AI에게만 자신의 깊은 감정을 털어놓는 모습도, 그 공감에 만족해서라기보다는 사람과의 진심 어린 만남을 갈망하는 마음의 다른 표현처럼 보인다. 어쩌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간절하게 사람과의 진심 어린...

[이런생각]당신의 여우와 말은 누구?

▲ 김건희 울산시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마음이 고장날 때가 있다. 해야 할 일들은 가득한데, 손끝 하나 움직이기 어려운 시간이 있다. 잠시 멈춰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다그치는 마음도 함께 커진다. 그럴 때면 억지로 속도를 내기보다, 혼란한 마음을 내려놓고 책 한 권을 펼친다. 큰 글씨와 따뜻한 그림이 어린 시절 애착인형처럼 나를 반겨주는 책. 찰리 맥커시의 <언제나 기억해: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그리고 폭풍우>이다.

맛있는 케이크를 아껴 먹듯 책장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케이크를 너무 사랑하는 두더지와 친구들 곁을 조용히 지키는 여우,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말, 그리고 종종 불안해하면서도 친구들을 깊이 사랑하는 소년의 모습이 따뜻한 스케치로 다가온다. 그들이 함께 지나가는 폭풍우의 시간은 이야기의 결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이 책은 원래 나를 위해 고른 책이 아니었다. 다섯 명의 동기가 함께하는 독서모임에서 읽기 위해 선택한 책이었다. 우리는 매달 한 권의 책을 돌아가며 고르고, 한 달에 한 번 점심시간에 모여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바쁜 일정 속에서 길게 시간을 내기는 어렵지만, 그 짧은 만남은 오히려 부담 없이 이어진다. 어떤 날은 서로의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을 나누고, 어떤 날은 힘들고 고단했던 각자의 하루가 먼저 꺼내진다. 책은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매개가 되어 준다.

붉은 말의 해가 시작되면서 나도 힘차게 달려보겠다며 다짐했지만, 봄이 오기도 전에 지쳐버린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보니, 문득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동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만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따뜻한 그림 속 주인공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를 함부로 평가하려 드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중 한 사람이 되진 마’ ‘네가 사랑하는 모두를 떠올릴 때…, 그 가운데 너 자신도 포함했으면 해’ 이 말들은 사춘기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매일의 삶을 소리 없이 견뎌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고 싶은 문장이다. 요즘 AI에게만 자신의 깊은 감정을 털어놓는 모습도, 그 공감에 만족해서라기보다는 사람과의 진심 어린 만남을 갈망하는 마음의 다른 표현처럼 보인다. 어쩌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간절하게 사람과의 진심 어린 만남을 바라게 되는지도 모른다.

너도 나도 모두 바쁜 일상 속에서 긴 시간을 내어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짧은 시간일지라도 기꺼이 서로에게 닿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관계를 이어주는 가장 단단한 이유일지 모른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끼리, 혹은 작은 모임 안에서라도 우리가 서로 듣고 싶은 이야기와 느끼고 싶은 감정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에게도, 단 5분 10분이라도 기꺼이 달려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김건희 울산시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경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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