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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대근 칼럼] 오디세이 정치학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는 구혼자로 가득 찬 이타카 왕궁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간 뒤 소식이 없자 이들은 왕비에게 구혼한다는 명분으로 눌러앉아 재산을 축내며 왕좌를 노린다. 환대의 규칙이 깨진 풍경이다.

[이대근 칼럼] 오디세이 정치학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는 구혼자로 가득 찬 이타카 왕궁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간 뒤 소식이 없자 이들은 왕비에게 구혼한다는 명분으로 눌러앉아 재산을 축내며 왕좌를 노린다. 환대의 규칙이 깨진 풍경이다.

고대 그리스의 공동체 규범인 환대의 규칙은 호혜와 상호 신뢰로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주인은 낯선 손님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손님은 주인의 재산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구혼자들은 이타카를 환대 아닌 적대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꿨다. 분열정치의 한국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위험해진 세계에서 오디세우스만 살아돌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 헬리오스 신의 소 떼가 있는 섬에 도착했을 때다. 선원들은 경고를 무시하고 소를 잡아먹는다. 그들은 무모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이어서 그랬다. 위험과 굶주림을 저울질했다. 헬리오스의 요청을 제우스가 들어주지 않으면 살 수 있다. 벌을 받더라도 배불리 먹고 고통 없이 빨리 죽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서서히 굶어 죽는다.

이들은 제우스의 벌로 모두 죽었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한 결과다. 오디세우스는 신성을 두고 손익계산하지 않았다. 그것이 ‘경외’다. 세상에는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할 것이 있다. 청동기 시대에 그것이 신의 명령이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공동체 최고 규범인 헌법이다. 헌법에 대한 경외를 잃을 때의 비극을 우리는 지난 정부 때 확인했다.

이재명은? 그 역시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직 대통령 중임 가능성을 열어두자. 혹시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뀔지 누가 아는가. 중임 개헌이 안 되면 공소취소로 재판을 중단시키면 된다. 선원들이 계산한 방식이다.

경외심은 절제를 가능하게 한다. 오디세우스는 소를 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기까지 했다. 세이렌의 유혹에 흔들릴 것을 알았던 그는 자신을 돛대에 묶었고,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풀지 말라고 명령했다. 절제와 자기 구속은 유혹을 이겨낼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유혹에 무너질 수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억제되지 않는다. 멀리 있는 야당보다, 선원처럼 곁에서 밧줄을 쥐고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갈 동지의 견제가 더 효과적이다. 김민석은 소를 먹는 선원인가, 밧줄을 쥔 선원인가?

그는 당대표에 취임하며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나 왕궁이 보여주듯, 집은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정청래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지명직 최고위원 인선 문제로 그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공소취소라는 시한폭탄은 째깍거리고 있다. 부동산·청년·양극화 같은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홍보위원장을 임명한 뒤 첫 지시로 대법원장 사퇴 현수막을 전국에 걸게 하고, 야당 의원 제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당대표직을 시작했다. 그의 정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암시한다.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일은 어렵지만, 손에 든 권력으로 환대 아닌 적대의 정치를 하기는 쉽다. 당대표 경선 때 공약한 ‘이재명 전면 방어’가 이런 정치공세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를 제거하지만, 구혼자 가문의 복수전이 펼쳐지면서 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신의 개입으로 양측이 화해하고, 오디세우스는 왕위로 복귀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인간이 풀지 못하는 갈등을 신의 개입으로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방식이다.

영화의 결말은 다르다. 오디세우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해 지는 서쪽으로 떠난다. 자신의 트로이 학살을 속죄하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다. 신의 개입 없는 갈등 해결이다. 정치 지도자는 행운을 가져다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등장을 바랄 수 있겠지만, 시민은 인간이 선택하고 책임지는 세계를 바랄 것이다.

놀런도 그렇게 그렸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내적 필연성 없이 외부에서 끼어드는 부당한 장치라고 싫어했다. 오디세우스가 서쪽으로 스스로 유배를 떠난 것처럼, 권력자가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모습은 영화에서만 보고 싶은 장면이 아니다.

경외심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싹튼다. 청동기 시대 그 존재가 신이었다면 지금은 시민의 시선이다. 권력을 쥔 자는 그 시선의 포로인 줄 알아야 한다.

이대근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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