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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다시 ‘하드 머니’를 찾는가 [홍익희의 비트코인 이야기]

태양광 패널, 전기차, 반도체, 데이터센터, 5G 통신 장비 등 첨단 산업이 확대될수록 은의 사용량은 늘어난다. 이처럼 은은 단순한 귀금속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산업 핵심 소재이기도 하다. 경기 호황기에는...

왜 세계는 다시 ‘하드 머니’를 찾는가 [홍익희의 비트코인 이야기]

(27) 디지털 시대 하드 머니

최근 세계 금융 시장에서는 흥미로운 변화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미국 국채 대신 금을 사들이고 투자자들은 전통 자산에 더해 비트코인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하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은에 대한 전략적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서로 다른 시장에서 벌어지는 이 세 가지 흐름은 겉으로는 별개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왜 세계는 다시 하드 머니(Hard Money)를 찾고 있는가.’

하드 머니란 공급이 쉽게 늘어나지 않는 화폐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는 금과 은이 대표적이다. 정부나 중앙은행이 정책적으로 공급을 늘릴 수 없다. 반대로 현대의 법정화폐는 ‘소프트 머니’에 가깝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조정하거나 채권을 매입하면 통화 공급이 크게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 금융 시스템은 철저히 소프트 머니 체제로 운영됐다. 1971년 미국이 금과 달러 교환을 중단하면서 금본위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달러를 중심으로 한 신용화폐(Fiat Money) 체제가 구축됐고, 금융 시스템은 국채와 은행 신용 창출을 기반으로 빠르게 팽창했다.

문제는 이 체제가 점점 더 많은 신용에 의존하게 됐다는 점이다. 세계 경제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부채가 필요했고, 금융 시장은 점점 더 많은 유동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 경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거대한 부채 위에 서 있다. 신용 위에 세워진 화폐 시스템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구글 제미나이로 생성된 AI 이미지

신용화폐 시대와 균열

지난 20여년 동안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는 여러 차례 큰 충격이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요 중앙은행들은 전례 없는 규모의 통화 팽창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QE)를 통해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국채와 모기지 증권 등 금융 자산을 대규모로 매입하면서 시장에 돈을 풀었고, 금리는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확대됐다.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대규모 재정 지출을 단행했고, 중앙은행은 이를 사실상 지원하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 결과 세계 통화 공급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미국 달러의 경우, 금융 위기 이후 거의 10배(1000%)나 급증했다.

통화 공급이 빠르게 증가하면 단기적으로는 금융 시장이 안정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화폐 가치에 대한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다. 팬데믹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급등했고, 많은 국가에서 물가 상승이 정치적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 문제는 더 심각했다. 미국의 경우 케이스-실러 지수(Case-Shiller Index) 기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60~70% 급등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자연스럽게 ‘정부가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는 돈’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하드 머니다.

금과 비트코인, 두 개의 하드 머니

최근 몇 년 동안 중앙은행들이 금 매입을 크게 늘리는 현상은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은 전통적으로 달러 표시 자산, 곧 미국 국채를 외환보유고의 중심에 뒀다. 그러나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지고 금융 시스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금 보유를 확대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게다가 2022년 미국이 러시아 외환보유고를 압류하자 각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은 예년의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블룸버그 데이터에 따르면, 1996년 이후 처음으로 세계 중앙은행 보유 금 비중이 미국 국채 비중을 다시 넘어섰다.

흥미로운 점은 디지털 시대에도 하드 머니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바로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은 총공급량이 2100만개로 제한돼 있다. 중앙은행이 정책적으로 공급을 늘릴 수도 없고, 정부가 통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금융 시장에서는 이런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금은 아날로그 시대 하드 머니이고, 비트코인은 디지털 시대 하드 머니다.’ 지난 2024년 1월 미국에서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가 승인되면서 기관 투자자 자금이 유입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비트코인은 더 이상 일부 기술 애호가들의 실험적인 자산이 아니라, 거시적인 자산 포트폴리오의 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산업 금속에서 전략 자산으로 떠오른 은

이 흐름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자산이 있다. 바로 은이다. 은은 역사적으로 금과 함께 화폐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현대 경제에서 은의 역할은 조금 더 복합적이다. 은은 화폐적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산업 금속이기도 하다. 은의 산업용 비중이 60% 이상이다. 태양광 패널, 전기차, 반도체, 데이터센터, 5G 통신 장비 등 첨단 산업이 확대될수록 은의 사용량은 늘어난다.

이처럼 은은 단순한 귀금속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산업 핵심 소재이기도 하다. 경기 호황기에는 산업 금속으로서 수요가 증가하고, 금융 불안이 커질 때는 화폐적 자산으로 주목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은은 금과 비트코인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금이 전통적 안전자산, 비트코인이 디지털 시대 희소 자산이라면, 은은 산업과 화폐의 경계에 있는 전략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드 머니의 귀환

금, 비트코인, 은이라는 서로 다른 자산이 동시에 주목받는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세계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신용만으로 유지되는 화폐 시스템에 대한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화폐 체제는 항상 진자처럼 움직여왔다. 신용 화폐가 팽창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그 반작용으로 하드 머니가 다시 주목받는 시기도 있었다. 19세기에는 금과 은이 화폐 시스템 중심이었고, 20세기에는 달러와 같은 법정화폐가 세계 금융 질서를 지배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화폐 체제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물론 달러 중심의 금융 시스템이 단기간에 무너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달러는 여전히 세계 무역과 금융의 핵심 통화이며, 미국 금융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깊고 큰 자본 시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흐름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중앙은행들은 금을 다시 사들이고 있고,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장기 자산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산업계에서는 은의 전략적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투자 트렌드가 아니라 화폐 시스템이 스스로 균형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신용화폐가 경제를 움직이는 중심에 서 있지만, 그 시스템의 안정성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축으로 하드 머니가 다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홍익희 칼럼니스트

[홍익희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2호(2026.03.25~03.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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