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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왕은 왜 고래수염을 선물했을까

고래는 우리 민족과 꽤 오래전부터 함께해 왔다. 신라 문무왕의 화장터는 경진(鯨津) 즉 '고래 나루 또는 고래 바다'였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고래는 우리 민족과 꽤 오래전부터 함께해 왔다. 신라 문무왕의 화장터는 경진(鯨津) 즉 '고래 나루 또는 고래 바다'였다.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고(葬以積薪) 고래 바다에 뼛가루를 뿌렸다(粉骨鯨津).(삼국사기)

이보다 앞선 고구려 민중왕 4년(47년) 9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鯨魚目)'을 왕에게 바쳤다. 이를 '고래의 눈' 또는'밤에 달처럼 환하게 빛나는 구슬'이라고 했다. 고구려 서천왕 19년(288) 4월에는 왕이 신성(新城)에 갔을 때 해곡태수(海谷太守)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 빛이 났다. 《고려사》에도 고래 기록이 나온다. 1273년 12월 25일 몽골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중서성 첩문에 따라 동계(東界)와 경상도에 가서 신루지(蜃樓脂)를 구했다. 이는 고래기름(鯨魚油)을 말한다. 말갈의 불녈부(拂涅部, 부족 이름) 가 '고래 눈(鯨睛)'을 바쳤다는 기사도 있다. ('신당서' 권 219 열전 144 북적 흑수말갈전)

고래 눈에 대한 기록은 '고래가 모래사장에 죽은 다음 획득하면 모두 눈이 없었는데, 속언에는 그 눈이 모두 명월주로 변하였다'(漢楊孚의 '異物志')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란 해석이 있다. 명월주는 군주의 덕정(德政)이나 장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데, 경어목 헌상 직후에 왕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조우연, 2019, '天帝之子: 고구려의 왕권 전승과 국가 제사', 민속원, 251~252쪽)

고래와 관련해 흥미롭고 수수께끼 같은 대목은 왕이 '고래수염'을 하사한 것이다. 1419년(세종 1년 8월) 상왕, 즉 태종이 내시 최한을 보내 황엄에게 흰 숫돌과 고래수염을 선사했다. 연산군은 한술 더 떠 1499년 9월 2일,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흰고래 수염 20개를 사서 대궐 안으로 들이게 하라"는 특이한 명을 내렸다. 1505년 8월에 왕이 전라도의 바다에 연한 고을들에 명하여 고래를 사로잡게 했는데, 부안 현감 원근례가 자청해 해도(海島)에 드나들었으나 두어 달이 되어도 잡지 못해서 그를 파직했다. 원근례는 무인으로 임사홍에게 뇌물을 주고 현감이 됐는데, 파직되자 분하여 죽었다.

'상왕이 내시 최한을 보내어, 황엄에게 흰 숫돌과 고래 수염을 선사하였다'는 새종실록 5권의 기록. 김잠출 제공

1725년(영조 1) 포항 영일에서 고래 3마리가 잡혔다. 하급 관리들이 고래 눈과 수염을 서로 빼앗으려고 싸웠다. 영조가 알고 해당 아전을 징계하고 고래의 눈을 쪼개 버릴 것을 경상감사에 지시했다.

왕이 고래수염을 선물하고 진상을 명하고 고래 눈을 귀하게 대접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용적·외교적·상징적 측면이 모두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래수염(鯨鬚)은 희귀하고 값비싼 사치품이자 공예와 각종 생필품의 원료였으니 조선에서 고래수염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고급 선물'이자,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유럽에선 군사·패션·종교적 맥락에서 고래수염이 다층적으로 중요시되었고, 왕실 조공이나 관세 등 국가권력의 상징 물품으로 여겼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고래수염이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웨일스·스코틀랜드 문헌에 13~15세기 중고등급 무기나 가우틀릿, 폴드론 등 갑옷 부위에 고래수염(baleen)이 사용되었다는 고고학 자료가 있다. 16세기에는 farthingale(치마 속 받침)과 bodice(코르셋) 구조에 사용되었고, 18세기에는 파라솔이나 보행 보조 지팡이에도 활용되었다. 1150년 바스크 지역 나바라 왕이 고래수염에 관세를 부과했고, 1237년 왕은 시즌 첫 고래의 backbone plate를 한 조각 가져간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고래는 동서양 모두에서 귀하고 값진 물품으로 대접받았다.

한편, 조선의 포경 기록은 19세기에 '異樣船'·'異國船'과 함께 시작된다. 울산을 떠들썩하게 하고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던 이양선은 미국 포경선으로 밝혀졌다. 그전까지 조선은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하면서 포경 자체를 포기했다. 고래를 잡으면 식량도 되고 기름을 얻을 수 있어 큰 이익이었지만, 관리들이 이익을 독점하고 어민들은 생고생만 하니 잡은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어 떠내려 보냈다. 관의 횡포가 우리나라의 포경 역사를 크게 후퇴시켰다고 봐야 하는 대목이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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