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신개념 뇌건강 치과학 XXV / 강동완

강동완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사)지구촌 뇌건강치과 AI연구소 대표2년 전 겨울 오스트리아 빈을 찾았을 때, 유독 오래 머문 공간이 있었다. 빈 분리파의 전당 제체시온(Secession)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신개념 뇌건강 치과학 XXV / 강동완

강동완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사)지구촌 뇌건강치과 AI연구소 대표

2년 전 겨울 오스트리아 빈을 찾았을 때, 유독 오래 머문 공간이 있었다. 빈 분리파의 전당 제체시온(Secession)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음악,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미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에서 제체시온은 낡은 권위에 대한 ‘창조적 파괴’를 공간으로 구현한 역사적 상징이었다.

빈 분리파는 19세기 말 보수적 예술 질서에 저항하며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철학을 온전히 담아낸 새로운 전시 공간, 제체시온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저항과 창조 정신이 가장 찬란하게 집약된 사건이 1902년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였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지하 공간에 대작 <베토벤 프리즈>를 그렸고, 막스 클링거(1857-1920)는 <베토벤 조각상>을 세웠으며,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가 직접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4악장을 편곡해 연주했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인류가 겪는 고난과 구원의 과정을 3면 34m의 대작으로 장엄하게 담아냈다. 나약한 인류가 구원을 간청하는 1면 ‘행복의 열망’, 괴물 티폰과 악의 무리가 위협하는 절망의 2면 ‘적대하는 힘’을 거쳐, 마침내 예술의 힘으로 억압을 이겨내고 천사들의 합창 속에서 환희의 포옹을 나누는 3면 ‘온 세계에 보내는 입맞춤’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제체시온의 지하 전시실은 단지 걸작 하나로 남은 곳이 아니다. 작품과 공간, 도시의 역사와 예술사의 맥락을 끊임없이 철학화하고 현재화해 온 굳건한 문화적 생태계 덕분에 세계인의 순례지가 됐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을 떠올린다. 우규승 건축가의 ‘빛의 숲’ 개념 아래 ACC는 주요 시설들을 거대한 지하 광장으로 배치했다. 혹자는 눈에 띄는, 거대하고 높은 랜드마크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만, 이는 지하의 대지(大地)가 품고 있는 심오한 철학적 힘과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읽어야 한다.

제체시온의 지하 전시실이 낡은 예술을 파괴하고 인류의 화합을 잉태했듯, ACC의 지하 공간 역시 광주의 아픈 역사로 아시아의 평화를 잉태하고 창조할 위대한 모성적 자궁이다. 관람객이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 항거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경찰청 건물에서 물러나 대지를 딛고 우러러볼 때, 마천루가 결코 줄 수 없는 깊은 인간적 성찰과 숭고한 연대를 경험하게 된다.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의 형제들이여, 대지에 충실하라”고 역설했다. 비현실적인 높이나 초월적 허상을 탐하기보다 굳건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라는 준엄한 선언이다. 지하의 대지를 딛는 것은 가상의 세계를 좇는 대신,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과 고통을 온전히 긍정하라는 ‘운명애(Amor Fati)’와 ‘초인’의 철학을 체화하는 고귀한 행위다.

물론 제체시온과 ACC를 평면적으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두 공간의 역사와 도시의 맥락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체시온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한 공간이 어떻게 낡은 질서를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세웠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그렇다면 지금 ACC는 창조적 파괴를 위한 시대정신의 서사와 핵심 콘텐츠를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 광주에는 5·18이라는 인류 보편의 숭고한 서사가 있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 뼈아픈 기억을 세계가 공감할 문학적 언어로 거룩하게 확장해 냈다. 그러나 이 성취를 노벨상 수상이라는 일회성 체험이나 단순한 관광 상품으로 소비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광주의 묵직한 서사는 인류애를 향한 공공의 성찰과 실천이어야 한다.

따라서 ACC는 전시와 공연 기획을 넘어 시민들과 함께 빛과 어둠, 목소리와 침묵, 폭력과 치유, 증오와 사랑을 융합하여 인류 평화의 사유를 끌어내는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문화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해 고심해야 한다.

언젠가 전 세계인들이 빛의 숲 지하 광장에 걸어 들어섰을 때, 아시아 속 광주의 정체성과 광주 속 아시아의 영혼으로 인류의 평화와 휴머니즘을 깨우는 위대한 걸작, 곧 ‘ACC의 21C 판 베토벤 프리즈’와 만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직 광주의 대지 깊은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압도적 예술이 창조되어 존재할 때, 아시아문화전당은 비로소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또 다른 세계적 문화의 성지로 부활할 것이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