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미 월드컵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잇따랐다. 인구 52만의 섬나라 카보베르데가 우승 후보 스페인과 0-0으로 비겼고, 1974년 이후 반세기 넘게 본선을 밟지 못했던 콩고민주공화국은 호날두의 포르투갈과 1-1로 맞섰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퀴라소도 남미의 강호 에콰도르와 0-0으로 비겼다. 낯선 나라들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실력의 위계를 흔들고 있다.
이번 월드컵부터 본선 출전국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었다. 아프리카에 배정된 직행 출전권은 5장에서 9장으로 늘었고, 대륙 간 플레이오프 한 자리도 새로 생겼다. 카보베르데는 늘어난 출전권을 발판으로 사상 첫 본선에 올랐고, 콩고민주공화국은 플레이오프라는 험로를 거쳐 52년 만에 돌아왔다. 퀴라소 역시 확대된 본선 무대에 힘입어 처음으로 월드컵 자리에 섰다. 출전국 확대가 없었다면 이들이 설 무대도 없었다.
사실 출전국 확대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스포츠 본연의 가치가 자본과 중계권 논리에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필자 역시 그 우려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거대 시장을 겨냥한 제도 변화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다수의 중국 기업이 FIFA의 핵심 후원사로 자리 잡은 현실은 그러한 의심에 무게를 더했다.
다만 현실은 그 비판의 구도보다 복잡했다. 정작 출전국이 늘어난 이번 대회에서도 중국은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제도가 설령 특정 시장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확대조차 ‘준비되지 않은 팀’을 본선에 데려다 놓지는 못한 것이다. 늘어난 출전권은 시장 규모가 아닌 경기력으로 자격을 증명한 팀에게 돌아갔다. 48개국 체제가 흥미를 떨어뜨릴 것이라 단언했던 유럽축구연맹 회장의 우려가 무색하게, 첫 이변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 연맹 소속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상업화에 대한 경계와 그 제도가 낳은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종종 어떤 제도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 결과까지 싸잡아 부정한다. 그러나 상업적 논리로 설계된 제도가 설계자조차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더 넓은 시장을 겨냥해 늘린 출전 기회가 그동안 세계 무대 밖에 머물던 주변국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동기를 비판하되 결과의 의미까지 외면하지 않는 분별, 그것이 이번 대회가 던진 첫 번째 물음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 축구 역시 오랫동안 세계의 변방이었다. 본선에 나가도 이기지 못하던 시절이 길었고, 강호의 들러리로 여겨지던 시간을 지나 비로소 큰 무대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약자에게도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을 때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것은 그 반대에 가깝다. 유소년 스포츠 현장은 이른 나이부터 한 종목에 모든 것을 걸게 하는 조기 전문화, 당장의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결과지상주의, 그리고 ‘될 성싶은 소수’만 일찍 가려내고 나머지는 일찌감치 기회 밖으로 밀어내는 선별의 논리로 채워져 있다. 늦게 피는 아이, 다른 길로 들어선 아이에게 우리의 시스템은 좀처럼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세계 축구가 기회를 넓혀 뜻밖의 주인공을 얻는 동안 우리는 기회의 폭을 얼마나 좁혀 왔는가.
이는 운동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회가 기회를 어떻게 나누는가는 그 사회가 어떤 미래를 갖게 될지를 결정한다. 기회를 일찍, 좁게 닫아 버리는 사회는 자신이 끝내 보지 못할 재능을 스스로 솎아낸다. 반대로 더 많은 이에게 무대를 열어 둔 사회는 설계자도 예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얻는다. 이번 월드컵에서 약소국들이 보여준 것은 평범하지만 잊기 쉬운 그 진실이다.
지나친 상업화는 여전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계가 우리의 눈을 가려 ‘변화가 함께 데려온 뜻밖의 가치’까지 놓치게 해서는 안 된다. 세계가 더 많은 이에게 무대를 내어 줄 때 비로소 새로운 주인공이 태어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얼마나 넓은 무대를 열어 두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약체들의 선전은 그렇게, 먼 대륙의 승부를 넘어 우리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돌아온다.
명왕성 한신대 특수체육학과 교수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