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정권이 다루기 만만찮은 적수가 시장(市場)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 오죽했으면 시장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했겠는가.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 잘못 건드렸다간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 재물과 일자리가 사라진다. 시장과 샅바 싸움에서 장대하게 이기는 정권은 드물지만 일반적 법칙은 있다. 진보는 샅바를 조이고, 보수는 느슨하게 푼다.
악마의 맷돌을 견제하는 대통령
하자 보수나 부품 교체 스타일에
전통적 보수 지역도 마음 여는데
미래를 돌파할 구조개혁은 묘연
시장의 이런 기질을 잘 아는 대통령을 갖는 건 국운이다. 사업 천재인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모르겠지만, 안다고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평생 업계에서 감각을 기른 MB는 시장을 얕봤다가 큰코다쳤다. 쇠고기 파동에 휘말려 초기 체력을 몽땅 소진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의의 칼’을 휘둘렀다가 아예 정권을 망쳤다. 최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시간 규제로 기습당한 시장이 악마의 맷돌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임기 내 눈치채지 못했다. 낙향해 책방 주인이 된 그가 지금은 깨달았을까. 시장에 관한 한 그는 ‘몽매 스타일’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시장의 변덕을 조금 아는 지도자로 보인다. 시장의 성깔을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그에게 거시 성장이론이나 구조개혁 같은 것은 없다. 잘고 소소한 것만을 다루는 지갑 경제, 밥상머리 경제다.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탈모(脫毛)나 생리대 가격 문제가 거론된 것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것도 국가 중대 사안을 다뤄야 할 연말연시 회의에서 말이다. 기름값 폭등에 대통령이 불쑥 꺼낸 아이디어가 노인 무임승차 제한이었다. 결국 불발로 그쳤지만 소비자들은 알아차렸다. 대통령의 신경은 온통 소비자에게 꽂혀 있다는 것을. 26조원 추경도 정확히 지갑 경제 방식이다. 여수산단이 멈춰 서고, 석유와 LNG를 실은 한국 수송선 26척을 호르무즈 내해에 가둔 전쟁의 충격파를 기름값 지원이나 최고 가격제로 풀었다. 소비자들은 한시름 놨고 기업은 적자에 직면했다.
그의 스케일은 작은데 치밀해 보인다. 통째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이 아니라 하자 보수 혹은 부품 갈아 끼우기다. 그런데 이게 통한다. 문정권 당시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스물네 차례나 주택시장을 공격했는데 결국 악마의 맷돌에 갈려 죽었다. 이번에는 대통령이 나섰다. 국토부 장관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노련한 부동산 중개업자처럼 대통령은 단 세 가지를 콕 집어 말했다. 집주인 실질 거주, 다주택 임대업자 규제, 보유세 강화.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집값은 썰물처럼 빠졌다. 전월세 대란이 일어나도 집값 하락에 묻혔다.
소위 ‘줌마 스타일’이다. ‘아줌마’ 세계의 치밀한 셈법과 분수를 지키는 실용적 양식을 김윤덕 기자는 ‘줌마 병법’이라 불렀다(조선일보). 쓴맛 단맛 다 본 살림살이의 고수, 겉멋 든 속물일지라도 알뜰살뜰한 실속형 주부가 ‘줌마’다. 역대 대통령들이 남발한 거대 담론에 신물이 난 민심은 차마 발설하기 쑥스러운 고민을 조곤조곤 살피는 ‘줌마 화법’에 끌리기 시작했다. 공적은 정권이 독식하고 그 대가는 서민이 치렀던 몰염치한 정치 양식에 넌더리가 났던 거다. 비정규직에 혜택을 더 줘야 한다는 비상식적 발언은 고사하고라도,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젊은 세대를 임시직 미아(迷兒)로 만든다는 그 지적에 울혈이 풀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근사하고 허황된 말만 쏟아냈다. 한결같이 ‘아재 스타일’이었다. 아재에 질려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린 아내(김윤덕, 『아내가 사라졌다』)가 ‘줌마 스타일’에 홀려 돌아왔다.
반도체, 조선, 방산만 빼고 경제가 죽을 지경인데도 대통령 지지율은 62%로 역대 최고다. 지방선거를 50일 앞둔 현재 지지율은 민주당 48%, 국민의 힘 20%로 두 배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국힘 지도부를 위시해 지방선거 후보군에는 여전히 ‘아재 스타일’이 그득하다. 영포티 룩인 장동혁 국힘 대표의 화법은 여전히 아재 스타일, 보수의 향수를 자극하지 못한다.
지난 1년 동안 국힘은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냈다. 내란을 속죄하는 데에 세월을 낭비했지만 아직도 마음의 얼룩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니 지방선거에 대비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극심한 인물난을 앓는 보수진영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지자체 선거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 지역은 서울과 경기도이고, 대구와 부산은 보수가 무혈입성하는 곳이다. 후보를 널리 구해도 경기도엔 사람이 없고, 대구와 부산조차 진보에 내 줄 판이다. 마치 경혈에 침을 놓는듯한 이재명 대통령의 줌마 스타일이 전통적 보수 지역에도 통하고 있다는 징후다. 야당이 전패(全敗)를 기록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줌마 스타일의 유효기간은 언제일까? 어찌 보면 그것은 도청(道廳) 스타일이다. 임기 일 년간 국운을 좌우할 구조개혁은 거의 없었다. 의료는 땜질 처방, 노동은 답례 보상, 교육과 복지는 손도 못 댔다. 대통령과 내각이 재미를 붙인 미주알고주알 화법에 기둥뿌리가 썩고 있을지 모른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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