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서평]중국 혁신의 현장을 걷다

AI 반도체·로봇·배터리·전기차·자율주행에 걸친 첨단 산업 현장을 직접 누빈 특별 취재팀의 눈으로 담아낸... 책은 올림피아드로 대표되는 수월성 교육이 어떻게 AI·반도체 개발자를 양성하는지를 추적한다. 수학...

[서평]중국 혁신의 현장을 걷다

중앙일보 특별 취재팀 르포 모음···최신 움직임 전달

‘짝퉁 천국’에서 기술 패권 중심으로의 도약 과정 분석

국가-지방정부-기업의 삼각 체제와 장기 전략이 핵심 경쟁력

지피지기 통해 한국의 나아갈 길 숙제로 제시

중국의 비약을 현장 중심으로 다룬 책이 나왔다. 딥시크 이후 중국 혁신의 아이템들을 발로 누빈 결과물이다. 중국 도약의 현상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중앙일보 특별취재팀 지음, 올림 출판사]

중국 변화의 현장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책이 나왔다. 올 설날에 공개돼 세계를 놀라게 한 궁푸로봇 사례까지 나올 정도로 따끈따끈하다. 지난해 초 딥시크 충격 이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며 현장 르포로 쓴 기사들을 묶은 ‘중국을 AI 리더로 만든 혁신의 설계자’이 그 갈증을 채운다. AI 반도체·로봇·배터리·전기차·자율주행에 걸친 첨단 산업 현장을 직접 누빈 특별 취재팀의 눈으로 담아낸 이 책은, 뉴스 단신으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 중국 혁신의 살아있는 맥락을 전한다. 딥시크를 만든 량원펑의 저장대, 세계 드론의 60%를 만드는 DJI를 키운 선전과기대, 사족 로봇 세계 1위 유니트리의 공장, CATL이 세운 닝더의 스마트 공장까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단편적 뉴스 뒤에 숨어 있던 중국 혁신의 실체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생생한 현장 르포와 구체적 수치의 결합이다. 유니트리 휴머노이드 로봇 R1의 가격은 단 5,900달러. 테슬라 옵티머스가 2만~3만 달러로 책정될 전망임을 감안하면, 이미 가격 혁명이 시작됐다.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스팟이 7만 달러를 넘는 반면, 유니트리의 사족 보행 로봇은 1,600달러다. 단순한 가격 경쟁력을 넘어, 이 회사가 운동 제어 알고리즘, 수직 계열화된 공급망, 모터·감속기·컨트롤러 자체 생산(비용의 75% 통제)으로 어떻게 이 가격을 실현했는지를 책은 낱낱이 보여준다. 딥라우트의 자율주행 시스템이 스위스 제품의 10분의 1 가격에 팔리는 메커니즘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격을 낮추고, 비용을 줄이는 과정에서 혁신이 탄생한다는 이 책의 핵심 명제는 수십 개의 현장 사례로 설득력 있게 증명된다. 아울러 딥라우트의 경우 직원 1천명에 연구개발 인력이 85%에 이르고, 화웨이의 1년 연구개발비가 대한민국의 국가연구예산과 비슷한 30조원대에 달하는 등 연구개발을 중시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짝퉁 천국’에서 최첨단 산업으로의 변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책에서 가장 독창적인 분석틀은 '3각 협력 구조'다. 국가가 큰 그림을 그리고, 지방정부가 과감히 실천하며,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역할 분담이 중국 혁신의 핵심 동력임을 이 책은 분석한다. 당과 국가는 '신형 거국 체제'를 통해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되, 단순한 계획 경제가 아니라 시장을 자원 배분과 우수 기업 선별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전기차에 녹색 번호판을 무료 발급하고, 공무원 아이폰 사용을 금지하며 화웨이를 밀어주는 방식이다. 2024년 출범한 '빅펀드 3.0'은 수익 회수 시점이 2044년으로 설정됐다. 20년을 기다리는 인내 자본이다. 이런 국가가 경쟁 상대라면 단기 실적에 쫓기는 자유시장경제 체제하 민간 기업은 버티기조차 쉽지 않다.

허페이(合肥)시 사례는 중국 혁신의 견인차인 지방정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벤처 투자자 지방정부'라는 별명을 가진 이 도시는 위기에 처한 BOE(京東方)에 과감히 투자해 디스플레이 패권을 일궜고, 이를 마중물 삼아 전기차 산업 사슬 전체를 허페이로 끌어들였다. 허페이의 투자 방식은 단순한 보조금 살포가 아니다. 전문가 팀이 산업을 면밀히 연구하고, 허페이의 기반 기술을 점검한 뒤 전문 기관과 협의해 투자를 결정한다. 투자 후에는 '큰 나무 옮겨 심기'(성장 잠재력이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기업에 투자해 본사를 이전시키기)와 '묘목 키우기'(중국 과기대 연구 성과를 스타트업으로 육성)라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한다. 허페이 퀀텀 로드에는 20개 이상의 양자 전문 기업이 집적됐고, 중국 최대의 양자 컴퓨팅 산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지방정부가 산업 정책의 실험장이자 벤처 캐피탈리스트가 된 것이다.

국가의 장기 전략이 현장에서 구현되는 방식도 이 책이 조명하는 중요한 주제다. '렌장 제도(链长制)'는 그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다. 공급망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인 렌장(链长)을 성급에서는 성장이, 시급에서는 시장이 맡는다. 기업(렌주·链主)이 시장 상황을 파악해 수요를 제시하면, 정부의 전담 실행 조직(렌반·链办)이 인재·토지·자금·기술·데이터를 신속히 재배치해 공급 애로를 해소한다. 정부가 심판이 아닌 선수로 뛰는 것이다. CATL의 사례는 이 구조의 결정판이다. 닝더(宁德)라는 작은 도시가 배터리 수도가 되기까지, 국가는 이중 상장을 허용하고, 지방정부는 도시 전체를 배터리 생태계로 설계했으며, CATL은 원자재 채굴부터 배터리 제조, 재활용까지 수직 계열화하며 한국·일본 대비 20% 낮은 가격을 실현했다.

인재 육성 시스템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책은 올림피아드로 대표되는 수월성 교육이 어떻게 AI·반도체 개발자를 양성하는지를 추적한다. 수학 국제올림피아드(IMO)에서 1985년 첫 출전 이후 2025년까지 25차례 1위를 차지한 중국의 성취는 단순한 학습 능력의 과시가 아니다. 강기계획(强基计划), 선전과기대의 부트캠프, 저장대 주커전 칼리지의 상위 1% 선발 엘리트 프로그램, 화웨이의 '지니어스 유스' 채용 시스템까지. 인재를 발굴하고, 기업과 연결하고, 창업 생태계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이 국가 차원에서 설계·운영되고 있다. 딥시크의 량원펑, 중국 AI 기업 즈푸의 탕제가 유학 한 번 없이 중국 대학에서 세계 수준의 AI를 만들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이 그려내는 중국 혁신의 전체 그림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국가가 20년을 내다보고 산업을 설계하고, 지방정부가 벤처 캐피탈리스트처럼 베팅하며, 기업은 생존을 걸고 가격과 기술의 한계를 밀어붙인다. 이 세 힘이 맞물릴 때 캠브리콘의 AI 칩이 나오고, CATL의 배터리 패권이 만들어지고, 선전의 로봇 생태계가 형성된다. 어느 한 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혁신이다. 발품 취재로 현장을 누비고, 구체적인 수치와 인물로 이를 실증한 이 책은 중국 혁신의 복잡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창문 가운데 하나다. 지피지기가 중요한 가운데 이 책은 중국을 보며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한다. 장기 전략을 못 갖고 있고 단기 비전 아래 각자도생에 급급한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이 책은 숙제로 남겨 놓는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