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세율 60% OECD 최상위권···30년째 손 못 댄 '낡은 세제'
삼성도 현대차도 '빚'으로 버텼다···세금이 기업 전략 왜곡
유산취득세 전환·세율 인하 수년째 검토만···'부자감세' 프레임에 발목
징벌적 상속세 앞에서 삼성도 현대차도 주식을 팔고 빚을 지고 있지만 정작 30년째 손 못 댄 제도는 여전히 제자리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12조원'.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유족에게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청구서였다. 그해 정부가 거둬들인 상속세 세수(3조9000억원)의 3배를 넘는 금액이다. 건국 이래 단일 납세자에게 부과된 최대 규모였다. 국내 1위 기업집단의 오너 일가가 5년간 주식을 팔고 빚을 지며 세금을 낸 과정은 한국 상속세가 무엇을 강요하는 제도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 최대 상속세'가 말해주는 것
이건희 회장이 남긴 유산 총액은 26조1000억원이었다. 삼성전자·삼성생명·삼성물산 등 계열사 지분만 18조9633억원에 달했다. 여기에 최대주주 할증 20%와 최고세율 50%가 적용됐다. 계열사 지분 상속세만 11조400억원이 산정됐고, 부동산 등 기타 자산분을 더해 최종 세액은 12조원을 넘겼다.
처음부터 일시납은 불가능한 규모였다. 유족들은 2021년부터 2026년까지 5년간 6회로 나눠 내는 연부연납을 택했다. 납부 방식은 유족마다 갈렸다. 이재용 회장은 계열사 지분을 단 한 주도 팔지 않았다. 배당금과 신용대출로 세금을 충당했다. 홍라희 명예관장과 이부진·이서현 사장 세 모녀는 달랐다. 보유 계열사 주식을 꾸준히 시장에 내놨다. 지난해 말까지 세 모녀가 처분한 삼성전자·삼성생명·삼성물산·삼성SDS 주식은 모두 7조2833억원어치였다. 올해 4월엔 홍 명예관장이 삼성전자 주식 1500만주를 3조800억원에 블록딜로 추가 처분하며 5년간의 납부를 마무리했다.
그 사이 삼성전자 지배구조는 조용히 재편됐다. 세 모녀 지분은 줄었고 외국인 투자자 비중은 높아졌다. 세금 때문에 10조원 넘는 지분이 시장에 쏟아진 결과다. 탐욕이 아니라 제도가 빚어낸 풍경이다.
정의선도 '승계 방정식' 풀기 바쁘다
현대자동차그룹 사정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7.24%)·현대차(5.44%)·현대제철(11.81%) 등 주요 계열사 지분의 최근 주가 기준 평가액은 약 4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세율 60%를 적용하면 정의선 회장이 부담해야 할 상속세 추정액은 약 2조6000억~2조8000억원에 달한다는 게 증권가의 시각이다.
삼성과 달리 지분 매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서로를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 탓이다. 핵심 지분을 처분하면 그룹 지배력이 흔들린다. 경영권 방어와 세금 납부,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정 회장이 주목하는 카드는 비핵심 계열사다. 증권가에서는 정 회장이 보유한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약 21.9%) 상장을 유력한 재원 마련 시나리오로 본다. 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추산하는 보스턴다이내믹스 기업가치는 128조~146조원 수준이다. 로봇 기업 상장 논의가 순수한 사업 판단만은 아니라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연부연납으로 수년에 걸쳐 낸다 해도 매년 수천억원의 현금이 필요하다. 세금이 경영 전략을 움직이고 있다.
'재벌 세금'은 옛말
과세 인원 20년 새 10배 이상
이 문제를 재계만의 고민으로 보는 건 현실과 거리가 멀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상속세 과세 대상 피상속인은 2002년 수천 명 수준에서 최근 2만명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20년 새 10배 이상 급증했다. 강남 아파트 한 채가 20억원을 넘는 시대다. 수도권 집값은 수십 년 새 몇 배로 뛰었다. 그러나 상속세 공제 한도는 1997년 이후 30년 가까이 그대로다. 납세자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기준선은 요지부동이다.
세율도 국제 기준에서 동떨어져 있다. 한국의 상속세 법정 최고세율은 50%로 OECD 최상위권이다. 최대주주 할증(20%)까지 더하면 실질 최고세율은 60%에 달한다. 세수 비중으로 보면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한국의 상속·증여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9%로 OECD 평균(0.36%)의 4배를 넘는다. OECD가 공식 보고서에서 한국 상속세를 '예외적으로 높은 부담'으로 명시한 이유다. 과세 방식도 독특하다. 상속세를 부과하는 OECD 회원국 중 피상속인의 전체 재산에 먼저 과세하는 유산세 방식을 쓰는 나라는 극소수다. 배우자 상속에까지 세금을 매기는 나라는 이 중 한국이 유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현행 제도가 유지될 경우 상속세수가 2040년 21조3000억원, 2062년엔 38조3500억원까지 불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손을 놓고 있으면 과세 범위는 계속 중산층 안으로 파고든다.
처방은 나와 있다, 꺼내들지 않을 뿐
전문가들이 꼽는 대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유산취득세 전환이다. 현행 유산세는 피상속인의 전체 재산에 먼저 과세한다. 유산취득세는 다르다. 상속인 각자가 받은 몫을 기준으로 개별 과세한다. 재산을 나눠 받으면 과세표준이 분산돼 세 부담이 줄어드는 구조다. 독일·프랑스·스위스 등 대다수 선진국이 이미 이 방식을 택했다. 기획재정부도 수년째 검토 중이다. 하지만 매번 '부자 감세' 프레임에 가로막혀 논의가 흐지부지됐다. 둘째는 세율 인하다. 성태윤 전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OECD 평균인 30%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논의가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 기업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비상장사 상장으로 실탄을 마련하고, 배당을 늘리고, 대출로 버틴다. 기업 경쟁력과 무관한 곳에서 경영 판단이 내려지고 있다. 세금이 경영을 왜곡하는 나라에서 그 안의 수십만 명도 함께 흔들린다.
한 재계 관계자는 "세금을 내지 말자는 게 아니라, 기업이 세금 때문에 경영 판단을 바꿔야 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며 "제도 설계를 근본부터 다시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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