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리 정부에 대미 투자 약속 이행을 거세게 압박하고 나선 상황에서 한·미 관세 협상을 총괄해온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그제 갑자기 경질됐다. 한·미 통상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움을 이끌던 지휘관이 돌연 직권면직된 것으로 파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통상교섭본부장은 차관급 직제지만, 대외적으로 통상장관 대우를 받는다는 점에서 경질 사유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미국은 한국의 대미 투자가 늦어지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지난달 말에 이어 지난주에도 우리 정부에 항의성 이메일을 직접 보냈다고 한다. 약속한 2000억달러 대미 투자(조선업 협력 1500억달러 제외)를 서두르지 않으면 한국에 적용하는 상호관세(15%)를 더 높이겠다는 뜻도 밝혔다. 청와대가 산업부 등 관련 장관들과 긴급회의를 연 것만 봐도 미국의 불만 수위가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미 정부의 투자 압박은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의 정치 일정을 감안한 것일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한국이 ‘상업적 합리성’을 앞세워 투자 프로젝트 선정을 너무 늦추고 있다는 불만 속에는 ‘자금 투입은 나중에 하더라도 먼저 투자 발표라도 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미국의 불만을 해소하면서 국익을 지켜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안았다. 안 그래도 미 무역법 301조에 따른 추가 관세 부과 가능성에다 미 의회의 쿠팡 역차별 주장 등 통상 현안이 산적해 있다. 대미 투자만 해도 미국이 재촉한다고 ‘상업적 합리성’이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가스화력발전소를 중심으로 1호와 2호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한 일본보다 늦긴 했지만, 발표 시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 수익성이다.
정부는 비상한 시기에 발생한 통상교섭본부장 공백을 산업부 통상차관보 중심으로 메울 계획이라고 한다. 비정상적인 통상교섭본부장 경질이 조금이라도 국익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경질 사유도 밝히는 게 옳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