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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람 죽어가는데 “에어컨 틀면 ‘극우’”…유럽 덮친 폭염이 만든 ‘새로운 전쟁’

폭염만큼 뜨거운 건 ‘에어컨 논쟁’이다. 유럽에서는 에어컨 확대를 주장하면 극우라는 비난을 받고, 반대로 반대하면 시민을 폭염에 방치한다는 공격을 받는다. 냉방기기 하나가 어떻게 정치와 이념의 상징이 됐을까.

클립아트코리아

폭염만큼 뜨거운 건 ‘에어컨 논쟁’이다. 유럽에서는 에어컨 확대를 주장하면 극우라는 비난을 받고, 반대로 반대하면 시민을 폭염에 방치한다는 공격을 받는다. 냉방기기 하나가 어떻게 정치와 이념의 상징이 됐을까.

12일(현지시간) CNN, 가디언 등에 따르면 최근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에어컨 사용을 둘러싼 논쟁이 단순한 냉방 문제를 넘어 기후정책과 정치 성향을 가르는 상징으로 변했다. 일부 극우 지지층은 에어컨 설치를 반대하는 환경정책을 ‘기후 히스테리’라고 비판했고, 반대로 일부 온라인에서는 에어컨 사용을 적극 주장하는 사람들을 극우 정치와 연결하는 조롱과 비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유럽 특유의 문화가 있다. 프랑스와 독일 등은 오랫동안 에너지 절약과 탄소 감축을 이유로 에어컨 설치를 최소화해 왔다. 대신 건물 단열과 자연환기, 녹지 조성 등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에어컨은 ‘미국식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인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폭염이 반복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프랑스에서는 휴대용 에어컨을 사려는 사람들이 할인마트에 몰려 출입문이 무너지고 몸싸움이 벌어질 정도로 수요가 급증했다.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25% 수준에 불과하며, 학교 에어컨 설치율은 7%에 불과해 수천 개 학교가 휴교했고, 6일간 2000명 이상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반(反)에어컨 정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CNN은 전했다.

극우는 “생명 문제” vs 좌파는 “기후위기 악화”

지난달 19일 프랑스 북부 메리쿠르의 한 주택가에서 가전 설치 기사들이 에어컨을 달고 있다. AFP연합뉴스

폭염은 곧 정치권 논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은 에어컨을 “공중보건 문제”라고 규정하며 학교와 병원은 물론 일반 가정까지 냉방시설을 확대 보급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좌파의 환경정책이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마르크 베른하르트 건설 담당 대변인은 “사람들이 에너지 효율 등급 같은 기후 이념의 제단에서 희생되고 있다”며 “기후 히스테리가 에어컨 설치를 막아 폭염 사망자를 늘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 급진좌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과 마뉘엘 봉파르는 “모든 곳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은 문제를 더 키우는 해결책”이라고 반박했다. 에어컨이 도시 열섬현상을 심화시키고 전력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결국 폭염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녹색당도 과거처럼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았다. 마린 통들리에 대표는 “에어컨은 더 이상 금기시할 대상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의 해답도 아니다”라며 병원이나 요양시설 등에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건물 단열 개선과 도시 녹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 역시 중간 입장을 취했다. 마티외 르페브르 생태전환부 차관은 “원자력 발전 비중이 높은 프랑스에서는 에어컨 자체를 금기시할 이유는 없다”면서도 “건물 단열과 도시 녹화 같은 근본 대책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찬반 논쟁보다 누구에게 필요한지가 중요”

지난달 26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 아이가 분수 앞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에서도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일론 머스크가 X(옛 트위터)에서 “유럽인들은 그냥 에어컨을 설치하면 된다. 여름을 대하는 미국식 접근이 옳았다”는 생성형 AI 답변을 공유했고, 조회 수는 2000만 회에 육박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극우와 좌파 모두 논쟁을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병원과 요양시설, 학교, 대중교통처럼 생명과 직결되는 시설에는 에어컨 설치가 필요하다는 데 정치권 전반이 공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유럽 대부분의 폭염 사망자는 고령층에서 발생하고 있어 취약계층 보호가 가장 시급하다는 것이다.

에어컨의 부작용도 존재한다. 실외기로 배출되는 열은 도시 열섬현상을 악화시키고 전력 수요 증가로 정전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럽의 전력 생산에서 화석연료 비중이 계속 감소하고 있어 냉방으로 인한 기후 영향은 과거보다 작아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유럽사무소의 한스 클루게 국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의학적으로 냉방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에게 에어컨을 공급하는 것”이라며 “동시에 나무와 녹지, 쿨루프, 건물 단열 등 모든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인프라를 함께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옥스퍼드대 기후과학자 클로이 브리미콤 박사는 “우리는 폭염 때 AI 데이터센터를 식히는 데는 막대한 전기와 물을 쓰면서 사람을 위한 냉방에는 인색하다”며 “사람의 생명이 AI보다 더 중요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논쟁은 ‘에어컨을 설치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기 위한 냉방 확대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장기적인 도시·건물 개선을 함께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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