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예능 출연자의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었던 ‘사람’이라는 틀이 깨지고 있다. 말을 걸면 대답하고,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질투와 서운함까지 내비친다. 사전에 입력된 대사만 읊던 초기의 가상인간을 지나, 인공지능(AI)이 독자적인 인격과 캐릭터를 갖춘 ‘출연자’로서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했다.
최근 방송된 SBS ‘나의 AI 파트너-기이안 연애’가 대표적이다. 기안84, 장도연, 이유비 등은 AI로 정교하게 구현된 파트너와 1대1 데이트를 즐겼다. 여기서 AI는 주어진 질문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챗봇을 넘어, 앞선 대화와 상황적 맥락을 학습해 출연자와 유기적인 관계를 쌓아나갔다.
흥미로운 지점은 기술 그 자체보다 이를 대하는 인간의 반응이었다. 기안84는 촬영 후 상대가 실재하지 않는 기계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묘한 설렘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꼈다고 털어놨다. AI가 인간을 온전히 대체하기보다, 기존 예능에서 좀처럼 포착하기 힘들었던 인간 본연의 낯선 감정과 반응을 끌어내는 촉매제로 작동한 셈이다.
AI의 방송 침투는 점진적이면서도 집요하게 진행돼 왔다. 지난 2024년 MBC ‘PD가 사라졌다’에서 AI PD ‘엠파고’가 출연자 캐스팅과 미션 설계, 편집 가이드라인을 주도하며 ‘AI가 예능을 연출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AI가 직접 플레이어로 뛸 수 있는가’로 논의의 축이 이동했다.
제작진 관점에서 AI 출연자는 실로 매력적인 대안이다. 스케줄 조율이나 컨디션 난조, 돌발 사생활 리스크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외형과 성격을 유지할 수 있고, 물리적으로 위험하거나 현실 구현이 불가능한 극한의 포맷도 거침없이 소화한다. 언어 데이터만 교체하면 하나의 캐릭터로 전 세계 각국 포맷에 동시 투입할 수도 있다. 출연자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기억하는 AI MC나, 시즌을 거듭해도 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AI 고정 멤버의 등장이 더 이상 공상이 아닌 이유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 이면에는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기술적 구현과 대중의 정서적 교감 사이에는 여전히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인간을 곧바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능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라며 “시청자는 출연자가 실수하고 관계를 쌓으며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서 정을 붙인다. AI에게 성격과 과거사를 입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실제 삶과 똑같이 받아들일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진짜 리얼리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제도적 공백도 도사린다. AI가 분노하고 사랑에 빠진다 한들, 그 알고리즘을 제작진이 설정했다면 이를 어디까지 자발적인 감정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남는다. 실존 인물의 외형과 음성을 복제할 때 발생하는 초상권과 IP 소유권 분쟁, 은퇴나 사후 활용 기준 등 기존 연예계 계약 관행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법적 쟁점들도 산적해 있다.
결국 당분간 AI의 현실적인 포지션은 인간을 밀어내는 ‘대체재’가 아닌 인간의 감정을 확장하는 ‘파트너’에 머물 전망이다. ‘기이안 연애’가 증명했듯, 현재 단계의 결정적인 재미는 AI 자체가 아니라 AI 앞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반응에서 비롯된다.
‘AI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효력을 다했다. 기술은 이미 제작 테이블을 지나 세트장 안쪽 깊숙이 발을 들였다. 이제 마주해야 할 질문은 보다 근원적이다.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도 시청자가 웃고, 화내고, 정을 붙일 수 있을까. 그 답이 ‘그렇다’가 되는 순간, 예능의 고정 출연자 명단에는 더 이상 사람만 적혀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khd998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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