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편지다. 집을 떠난 지 석 달. 여름이 지나고 가을 농번기가 한창인 고향의 사정을 걱정하는 마음이 행간마다 배어 있다. 풍류를 담은 한자와 정갈한 문장으로 쓴 지식인의 편지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은 편지지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서툰 글들이다. 그 투박함 속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다.
편지의 끝은 대개 비슷하다. “답장을 꼭 보내 달라”는 부탁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편지를 쓴 이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수신인에게도, 발신인에게도 닿지 못한 채 남겨진 편지들은 기획 제목 그대로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됐다. 편지 속 이들은 “잘 지내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가족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종이조차 넉넉히 구하지 못해 여백을 빼곡히 채운 글씨와 군데군데 번진 흔적은 그 말과는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선, 가족의 안부조차 쉽게 전할 수 없던 열악한 전장의 풍경이 편지장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모두 97통이 남아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깊숙이 보관돼 있던 이 편지들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통해 온라인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은 자칫 이념 논쟁으로 번질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편지는 가족을 향한 걱정으로 채워져 있다. 발신자들은 고향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인천에 온 지 석 달 남짓 지났지만, 자신은 건강히 지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거듭 전한다.
▲ 김성희가 어머니 최인옥에게 쓴 편지.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김성희가 어머니 최인옥에게 쓴 '오마님 전상서'를 보자.
세월은 빨라서 어느 듯 여름 다 지내고 가을을 당하여 가내 제철이 다 평안 아시기을 바랍니다.
저는 인천에 와서 훈련과 공부을 하면서 객지에 몸 건강하는 것은 오마님과 당신이 넘네(염려) 하여 주는 덕인줄 압니다. 오마님께 죄송한 것은 니여(그저) 편지 못한 것은 사정상 그러케 되여스니 그리 아시고 나헤(이해) 하여 주기를 바라며 그저 간도 농사에 얼마나 수고하고 이습니까. 뉘님네 댁도 다 평안 하신지도 알고시고(알고싶고) 저를 위하여서는 조곰(조금)도 넘네(염려) 마시고 안심하시기을 바랍니다.
오마님과 당신에 몸건강을 축복하나이다 이만
1950년 9월14일
평안북도 의주군 교만면 상단리 8번지에 사는 어머니 최인옥을 향한 김성희의 편지는 농사일로 바쁜 어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쓰지 못한 죄송함이 가득 담겨 있다.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곳은 1966년 1월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의 서국태가 쓴 <고고민속>에 고려시대 어망추·창·동전·문돌쩌귀 등이 출토된 집터가 출토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위화도와 인접한 압록강 유역의 농경지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농업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 한응수가 부인 신선옥에게 당부한 채무 상환 편지 내용.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한응수가 부인 신선옥에게 쓴 편지는 9월 12일 작성됐다.
나는 평야서 동무들를 집게서 하나와스나(나는 평양에서 동무들과 함께 집결하여 내려왔으나)
(중략)그 세간 편지 열악엿서스니 이제부턴 편지열락해 주식기를 바랍나이다(그동안 편지 연락이 끊겼었으니 이제부터는 편지로 자주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려나, 나는 근심하는 것슨, 강칠수동무에 게 금전를 오백원 꿔서가지고 왓습니다(그러나 내가 근심하는 것은, 강칠수 동무에게 돈 500원을 빌려서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신선옥 동무는 이 금전를 어덧컷선지 갚아 주시오 (신선옥 동무(아내)는 이 돈을 어떻게 해서든 꼭 좀 갚아 주십시오)
신선옥동무는 나는 통일리대면 만나볼수가 잇슴니다 (신선옥 동무, 우리는 나중에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헐말를 마는나 이상으로서 끗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지만 이상으로 글을 끝맺습니다)
자강도 만포군 고산면 미타리에 사는 부인 신선옥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친구에게 빌린 돈을 대신 갚아 달라는 부탁이 담겼다. 또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문장에서는 길어질 이별을 예감했거나,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운 전장의 불안감이 묻어난다. 자강도는 평안북도에서 분리돼 설치된 지역이다. 현재 만포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지린성 지안시와 마주하고 있으며, 고산면은 고사리가 많이 난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 김석태가 고향에 형 김석운에게 남겨 놓은 돼지를 부탁하는 편지.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김석태가 고향의 형에게 부탁한 돼지는 어떻게 됐을까. 가족 걱정도 컸을 김석태가 돼지 안부를 유독 강조한 사연을 살펴본다.
형님께 가는 상서. 춘화춘절오 (형님께 올리는 편지. 봄과 같이 늘 평안하시기를 원하오며)
그간에 형님께서도 다 무꼬(무사)하지요. 제 집에서도 다 편안 하신지요.
그간 저는 집에서 떠난지 2개월 간에 인천시에 와서 신체는 건강하오니 그리 알고 집에 서도 안심하고 이스시오
그리하고 그간 제 집에 도야지를 내지말고, 내가 집에 가도록까지 내지말 이스시오 (내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팔지 말고 있으십시오)
그리알고 3년이 되드라도 도야지는 내지말고 이스시오.
(중략) 저는 일년 있다가 못가시면 평화적 통일이 되야 만 집에 갈주을 아르시오.
앞선 한응수와 마찬가지로 김석태 또한 집에 돌아갈 날이 멀어졌음을 직감한 듯하다. 김석태에게 가장 큰 재산은 집에 남겨두고 온 돼지였다. “3년이 되더라도 돼지를 팔지 말라”는 당부까지 담았다.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작성된 편지에는 전장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이 녹아 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7월부터 약 두 달간 이어진 인천의 인민군 점령도 막을 내렸다.
▲ 김성익이 자강도에 남겨진 모친께 건강을 당부한 편지.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김성익과 김찬익은 형제다. 형제가 함께 근무한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두 아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떠올려야 할까. 이들이 각각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모친 전상서 (어머니 전상서)
모친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그간 모친님 소식 한 자도 못서니 그것이 지나서 모친님에게 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전하게 되였습니다.
(중략) 올해 가을에는 저에 대하여 안심하시기를 싶어 하며 다시 매일 우리 대는 군사 훈련과 정치 학습에 열중하고 있으며 배우는 열정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한편 고향에 가족들 친척 동포들이 모두 무사하온지 이 자식은 밤이면 생각은 잠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올해 가을에 하기가 같기 때문에 가을철 농사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고향에 어머니는 조국 통일의 그날까지 안녕히 계시기를 축원하며 만유부득 전진 하면서 끝치겟습니다 (그러면 올해 가을걷이 농사철을 맞아,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고향의 어머니께서는 조국 통일의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기를 축원하며, 만사 뜻대로 되기를 바라며 글을 끝맺겠습니다.)
1950년 9월 10일 자식 성익 올림
▲ 김찬익이 자강도에 남겨진 모친께 건강을 당부한 편지.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모친주전상서
모친님을 때때로 상면치도 못하며 편지 한 장이라도 때때로 하지 못하오니 죄송합니다.
(중략)그리고 우리 군사는 언제든지 한 가매 밥 먹어가며 적들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사들은 언제나 한솥밥을 먹으며 끈끈한 동지애로 적들과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속히 회답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모친님과 가중에서 신체건강을 축복하면서 끝이는 바입니다
1950년 9월 12일 김찬익 올림
김찬익·성익 형제는 자강도 만포군 이서면에 거주하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겼다.
동국대 국문과 김영배 교수는 분단 이후의 북한 지명과 행정구역 변화를 알렸다. 현재 만포군은 만포시로 승격됐지만 이서면 함부리 지명은 남은 것으로 보인다. 만포군은 압록강을 바라보며 당시 오랑캐와 싸워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이란 정자가 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김성익은 장모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에게 부친 편지와 수신 주소가 같은 것으로 보아 친가와 처가가 함께 살았거나, 어머니를 통해 편지를 전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정확한 배경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주영·라다솜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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