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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리사 비밀유지권은 혁신기업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

한국반도체산업협회의 회원사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만이 아니다. 대다수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의 중소·중견기업이다. 이들은 단 하나의 핵심 기술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변리사 비밀유지권은 혁신기업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공학박사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와 특허 출원 역량을 보유한 기술 강국이다.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인공지능 등 첨단 산업에서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구조적 취약점이 존재한다.

기술은 한번 유출되면 되돌릴 수 없다. 특허 전략, 연구개발 방향, 내부 기술 검토 자료와 같은 정보는 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으로, 외부에 노출되는 순간 경쟁력의 근간이 무너진다.

특허 업무는 그 특수성상 반드시 변리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특허 명세서 작성, 선행기술 조사, 권리범위 해석, 무효심판 대응 등은 기술적 전문성과 법적 판단이 동시에 요구되는 고도의 전문 업무다.

기업은 연구개발 초기 단계부터 특허 출원, 등록, 분쟁 대응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변리사와 긴밀히 협력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핵심 기술 전략과 내부 검토 자료 등 극히 민감한 정보가 오간다.

변리사는 단순한 절차 대리인이 아니라 기업의 기술 전략을 함께 설계하는 핵심 파트너다. 그런데 이 의사소통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은 기업의 핵심 기술이 언제든 외부에 노출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최근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가 다양한 법률에서 입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디스커버리를 통해 침해 사실 자료를 확보하는 것과 기업이 연구개발 및 사업화 단계에서 분쟁 방지를 위해 변리사로부터 법률 검토를 받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소송에서 정당한 증거 확보의 수단이지만 후자는 기업이 법적 리스크를 사전에 관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문 과정이다.

비밀유지권이 없다면 기업은 분쟁 예방을 위한 내부 법률 검토조차 자유롭게 받지 못하고 이는 오히려 더 많은 분쟁으로 이어지는 역설을 낳는다.

국제 특허 분쟁 현장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변리사 비밀유지권이 없는 현 상황에서 해외 기업과 분쟁이 발생하면 국내 기업은 말 그대로 ‘발가벗겨진 상태’로 법정에 서는 것과 다름없다. 상대 외국 기업은 자국의 비밀유지권 제도 아래 전략 문서를 철저히 보호받는 반면 우리 기업이 변리사와 주고받은 자료는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노출될 수 있다.

이미 주요 선진국들은 변리사의 기술 전문성을 인정하고 관련 의사소통을 보호함으로써 자국 산업 경쟁력을 지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법적 쟁점이 아니라 국가 산업안보의 문제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의 회원사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만이 아니다. 대다수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의 중소·중견기업이다. 이들은 단 하나의 핵심 기술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기술 유출은 곧 기업의 생존 문제로 직결된다.

대기업은 방대한 법무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중소기업에게는 변리사와의 협력이 사실상 유일한 기술 보호 창구다. 변리사 비밀유지권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이들 현장의 중소 혁신기업들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이미 6여년 전부터 지식재산처(당시 특허청)에 변리사 비밀유지권 도입의 필요성을 꾸준히 건의해 왔다. 산업 현장에서 체감하는 위험과 절박함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변호사에게는 비밀유지권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변리사 업무에 대한 보호가 부재하다면 기업은 기술 자문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받아야 할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산업 전반에 돌아간다.

최근 관련 법안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하면서 산업계에서는 큰 기대와 함께 환영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관문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통과다. 기술을 만드는 것만큼 기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변리사 비밀유지권은 혁신기업의 기술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이며 산업계는 이번 제도가 조속히 입법화되어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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