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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종면칼럼] SK㈜ 자사주 소각의 진짜 의미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최근 발표된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입니다. 삼성전자는 16조 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금액만 보면 SK보다 세 배 이상 큽니다. 하지만 두 기업의 자사주 소각은 의미가 전혀...

소버린 사태 20년, 경영권 방어 전략의 대전환'행동주의' 시대, '지분'보다 '신뢰'가 더 큰 방패하이닉스 중심 전략…"SK스퀘어와 합병 첫걸음"'가족경영'에서 시스템 중심 경영으로 전환 예고2003년 SK그룹은 생존을 건 싸움을 벌였습니다. 헤지펀드 소버린이 지주사 격인 SK㈜ 지분 14.99%를 사들이며 경영권 공격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 SK는 '분식회계 사태'로 최악의 위기를 맞은 상황이었습니다. 소버린은 지배구조 개선과 최태원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전면전을 선언했습니다.SK가 2년 4개월여에 걸친 적대적 M&A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자사주'였습니다. 자사주는 평소에는 의결권이 없지만 필요할 때 우호 세력에게 넘기면 의결권을 되살릴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카드입니다. 실제로 SK는 자사주를 활용해 우호 지분을 확보했고, 결국 소버린은 2005년 7월 SK 주식을 팔고 떠났습니다.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SK는 그룹의 지주사 자사주를 스스로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최근 SK㈜ 이사회는 보유 자사주 25% 가운데 임직원 보상 목적을 제외한 20%를 소각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금액으로는 대략 5조 원에 이르는 대한민국 지주사 역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자사주 소각 예정일은 내년 1월 4일입니다.SK㈜는 그룹의 지주회사이지만 동시에 투자와 사업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사업형 지주회사'입니다. 따라서 사업으로 돈을 벌기도 하지만 배당이나 브랜드 로열티가 중요합니다. 이런 구조에서 5조 원이라는 거금을 주주환원에 쏟아붓는 것은 대주주의 지배력 약화 리스크를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지주사 중 최대 규모'라는 타이틀은 최태원 회장이 '자사주 방패'라는 구시대적 유물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버림으로써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5조 원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SK그룹의 경영권 방어 패러다임을 '지분 보유'에서 '주주 가치'로 완전히 바꾼 기회비용입니다. 그래서 재계와 금융시장은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소버린 사태의 기억을 가장 또렷하게 갖는 기업이 바로 SK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SK는 경영권 방어의 상징이었던 지주사 자사주를 왜 스스로 불태우겠다는 것일까요.상법 개정과 버릴 수밖에 없는 방패여기에는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환경 변화와 재벌 지배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사주를 쌓아두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소각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전략이 경영권을 지키는 더 강한 방패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무엇보다 결정적인 변화는 제도입니다. 지난 6일부터 자사주 의무 소각이 담긴 '3차 상법 개정'이 시행되면서 자사주를 계속 보유하려면 매년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야 하고, 처분 시에도 신주 발행 수준의 엄격한 규제가 적용됩니다. 과거처럼 자사주를 백기사에게 넘겨 경영권을 방어하는 방식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습니다.결국 선택지는 단순합니다. 자사주를 소각하거나 매년 주총에서 주주들과 싸우며 보유 승인을 받는 것입니다. 소액주주와 국민연금,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자본시장에서 주주들과 싸우면서 자사주 보유를 매년 승인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SK가 지주사의 자사주 소각을 선택한 것은 '용기 있는 결단'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달리 옵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겉으로 보면 SK의 자사주 소각은 경영권 방어 수단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경영권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른바 '자사주 소각의 역설'입니다.첫째, 방패를 버렸는데 지분율은 오히려 올라갑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전체 발행 주식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대주주의 절대 주식 수는 변하지 않아도 지분율은 자동으로 상승합니다. 실제로 이번 자사주 20% 소각으로 최태원 회장을 포함한 특수관계인의 SK㈜ 지분율은 기존 25.5%에서 약 32% 수준으로 올라갑니다. 최 회장 개인 지분율도 17.9%에서 소각 후 22.5% 수준으로 높아집니다.경영권 분쟁에서 지분 30%는 매우 상징적인 수치입니다. 주주총회에서 일반적인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큰 무리가 없는 수준이자 외부 세력이 적대적 M&A를 시도하기에 심리적·비용적 부담이 급격히 커지는 지점입니다. 최태원 회장 개인적으로 봐도 이혼 소송 등으로 상당한 현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사주 소각으로 자신의 지분율을 5% 가까이 끌어올린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입니다.SK 지주사 자사주 소각의 3가지 역설두 번째 자사주 소각의 역설은 자사주를 없앴는데 공격 명분도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을 공격할 때 가장 흔히 쓰는 논리는 "자사주를 쌓아두고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SK는 자사주를 아예 없애버림으로써 이런 공격의 빌미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세 번째 역설은 자사주를 소각했는데 경영권은 더 안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주식 수가 줄어들면 당연히 주당순이익(EPS) 등 주당 가치와 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기업가치가 높아질수록 외부 세력이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도 커지기 때문에 적대적 M&A는 그만큼 더 어려워지고, 대신 경영권 방어는 더 쉬워집니다.일부에서는 SK㈜ 시가총액이 대략 24조 원이니 절반인 12조 원이면 지주사를 인수할 수 있다는 단순 계산도 내놓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자본시장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적대적 공개매수를 선언하는 순간 주가는 급등하고, 경영권 인수에는 통상 30~50%의 프리미엄이 붙습니다. SK㈜처럼 SK하이닉스나 SK스퀘어 같은 핵심 자산을 가진 지주사의 경우 실제 필요한 자금은 더 늘어납니다. 12조 원이 아니라 최소 20조~30조 원 이상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여기에 국민연금과 기관투자가 같은 장기 투자자들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안정적인 기업 경영을 지지하는 성향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사주까지 과감하게 내려놓은 SK의 우호 지분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SK㈜를 노리는 외부 세력이 확보해야 할 지분은 훨씬 더 커집니다.누구든 SK 지주사 SK㈜를 인수하는 순간 그 아래 있는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등 국가 기간 산업을 동시에 지배하게 됩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반도체 기업이자 국가 전략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반도체와 통신, 에너지 산업은 단순히 특정 기업의 자산이 아니라 국가 경제 및 안보와 직결된 분야입니다.적대적 M&A가 절대 불가능한 이유들이런 구조를 고려하면 외국계 사모펀드가 SK 지주사에 대해 적대적 인수에 나설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극히 희박합니다. 설령 100조 원을 들인다 해도 정부와 정치권, 금융권의 견제와 산업 구조를 넘어서기는 어렵습니다. SK하이닉스는 이제 단순한 기업을 넘어 한국 산업을 떠받치는 전략 산업이자 '호국 산업'의 성격까지 갖고 있고, 그 지주사인 SK㈜에 대한 적대적 M&A는 이와 비례해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보는 게 상식입니다.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최근 발표된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입니다. 삼성전자는 16조 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금액만 보면 SK보다 세 배 이상 큽니다. 하지만 두 기업의 자사주 소각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은 전형적인 주주환원 정책입니다. 반면 SK의 자사주 소각은 지주회사 지배구조의 핵심을 건드리는 결정입니다. 금액은 삼성보다 작지만 의미는 훨씬 큽니다.더 근본적인 변화는 따로 있습니다. 경영권 방어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지분을 사 모아 방어했습니다. 순환출자와 자사주, 백기사 같은 게 대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자본시장의 주인은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입니다. 경영권은 더 이상 숫자만으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주주들의 신뢰와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SK의 자사주 소각은 바로 그 점을 겨냥한 결정입니다. '가짜 방패' 대신 '진짜 방패'를 든 셈입니다.사실 이런 선택은 SK 역사에서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2011년 많은 기업들이 외면하던 하이닉스를 인수한 것도 최태원 회장의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워크아웃 기업이던 하이닉스는 SK가 인수한 후 세계 메모리 시장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최근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의 10%를 직원 성과급으로 지급하고, 성과급 상한을 없앤 것도 파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번 지주사 자사주 소각은 세 번째 결단입니다. 이런 결정들의 공통점은 단기적 위험이나 득실보다 장기 경쟁력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이번 자사주 소각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은 최태원 회장이 아니면 쉽게 하기 어려운 결단입니다.SK㈜ 자사주 소각은 SK의 승계 구도와 지배구조에도 중요한 변화를 예고합니다. 현재 최태원 회장의 지주사 지분은 17% 수준입니다. 상속세 부담까지 감안하면 과거의 재벌기업처럼 지분을 자녀들에게 넘겨 경영권을 유지하는 전통적인 세습 승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상식적입니다.실제로 최태원 회장은 "아이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보다 내가 안전하게 은퇴할 수 있는 회사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주주로서의 베네핏을 물려주는 것이 더 낫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해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자사주 소각은 '세습 중심 가족경영'에서 '시스템 중심 기업경영'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이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50% 지분에 집착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절대 자사주 소각이라는 결단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최태원의 세 번째 결단, 자사주 소각또 하나 주목할 변화는 그룹 내 사업 구조의 중심 이동입니다. 지금 SK그룹의 가치와 성장성을 결정짓는 핵심 축은 단연 SK하이닉스입니다. 그런데 SK하이닉스는 SK스퀘어의 자회사이자 SK㈜의 손자회사입니다. 지주회사와 하이닉스 사이에 SK스퀘어라는 중간 지주회사가 존재합니다.이번 자사주 소각으로 지주사 가치가 높아지면 그룹 지배구조 재편의 선택지도 넓어집니다. 시장에서는 중간 지주회사인 SK스퀘어와의 구조 재편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SK 측은 공식적으로 합병설을 부인하지만 지주사 SK㈜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이런 구조 재편을 추진할 유인은 커집니다.만약 장기적으로 구조 재편이 현실화된다면 SK는 에너지와 통신 중심의 기업집단에서 반도체 중심 그룹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 경우 반도체에서 창출되는 막대한 이익이 지주회사로 흘러 들어오고, 그 자금이 그룹의 투자와 전략을 좌우하게 됩니다. 현재 SK그룹이 시달리고 있는 SK온 등 SK이노베이션 계열사들의 자금난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습니다.현재는 시가총액 기준 SK㈜ 약 24조 원, SK스퀘어 약 70조 원 수준이어서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최태원 회장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이 각각 약 6%, 8%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회사의 시가총액이 비슷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합병 결단이 내려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 SK㈜의 5조 원 자사주 소각은 이런 구조 변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신호로 읽힐 수 있습니다.한편 삼성, 현대차와 함께 재계를 이끄는 SK의 자사주 소각은 다른 그룹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롯데나 HD현대처럼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들도 이제 같은 질문을 받게 됐습니다. 자사주를 계속 쌓아둘 것인가, 아니면 소각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일 것인가. SK와 최태원 회장의 결단이 재계 전체에 '메기 효과'를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20년 전 SK는 자사주라는 방패로 소버린을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SK는 그 방패를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장욕취지 필선여지'(將欲取之 必先與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얻으려면 먼저 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SK의 자사주 소각은 바로 그 역설을 보여줍니다. 방패를 버렸는데 경영권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습니다. 돈으로 지분을 사서 기업을 지키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주들의 신뢰와 시장의 지지가 기업을 지키는 진짜 방패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복판에는 또 한 번 최태원 회장의 냉철한 계산과 결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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