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사이클에 가격 ‘치킨게임’ 실종
만년 적자 중국 기업까지 살려내
자만·착시 경계하고 실력 쌓아야
박일근 한국일보 수석 논설위원
반도체 업계에 대호황을 뜻하는 슈퍼사이클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컴퓨터용 D램 가격은 1년 만에 10배로 뛰었다. 휴대폰용 낸드플래시 값도 5배가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비중을 늘리며 D램과 낸드 공급이 부족해진 영향이다. 덕분에 두 회사의 올해 영업이익은 각각 200조 원 안팎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란 전쟁과 ‘터보퀀트’(구글의 메모리 압축 기술) 논란에 주가가 출렁거리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를 대표하는 업종의 실적 개선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한국 반도체 산업이 가장 긴장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슈퍼사이클은 우리에게만 온 게 아니란 걸 명심해야 한다. 사실 한국 기업보단 중국 기업에 더 큰 수혜가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기업의 흥망사는 ‘치킨게임’의 역사로 요약된다. 1990년대 20여 곳에 달했던 D램 반도체 기업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의 빅3 체제로 재편된 건 살벌했던 가격 인하 전쟁의 결과다. 이 과정에서 한때 세계 2위였던 독일의 키몬다가 파산하고, 일본 업체 엘피다도 쓰러졌다.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중국 반도체 기업들도 치킨게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적자가 지속되면 아무리 정부 지원을 받아도 한계에 봉착한다. 그런데 갑자기 슈퍼사이클이 도래, 게임의 룰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만년 적자였던 중국 기업들도 기사회생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은 가격을 내려 후발 업체들이 도저히 버틸 수 없도록 몰아가던 치킨게임 전략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슈퍼사이클을 마냥 달가워할 순 없는 처지다.
대표적 기업이 중국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다. 지난해까지도 적자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흑자 전환이 확정적이다. 잊혔던 키몬다의 특허를 사들여 초기 진입 장벽을 넘고, 적자 속에서도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은 것도 주효했다. 조만간 상장으로 더 많은 투자금을 확보하면 설비를 늘려 한국을 바짝 추격할 수도 있다. 낸드 분야엔 양쯔메모리(YMTC)가 있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어느새 12%까지 올라섰다. 중국 업체들만 쓰던 양쯔메모리 낸드를 이젠 공급난에 세계적인 기업들도 검토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호황은 실물 경제와 금융 시장의 쏠림을 강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수출이 매월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는 것도 온전히 반도체 덕이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반도체 비중은 37%까지 치솟았다. 2월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29%나 증가한 것도 반도체가 160%나 늘어난 효과다. 반면 올해 우리 경제 성장률은 1%대로 점쳐진다. 전반적인 실물 경제는 여전히 한겨울인데 반도체 경기만 뜨거우니 괴리가 심하다. 반도체만 보고 전체 실물 경제를 잘못 판단하는 우를 범해선 곤란하다. 증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만 급등, 두 기업의 시가총액이 코스피 전체의 40%를 차지할 정도다. 이젠 양 기업 주가가 증시 전체의 변동성을 키우는 리스크가 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숫자가 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며 위기의식을 강조한 것도 이런 슈퍼사이클의 양면성을 짚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건희 선대회장도 “앞으로 뭘 먹고 살지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니 한국은 샌드위치 신세”라며 죽비를 내리곤 했다. 1년 전만 해도 팽배했던 위기론이 쑥 들어간 것처럼 1년 후엔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시장을 주도할 실력을 쌓는 게 정석이다. 지금은 결코 신발끈을 풀 때가 아니다. 반도체마저 중국에 내줄 순 없지 않은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