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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소영의 시선] 당연한 것들의 유료화, ‘경제 요새’의 시대 왔다

미국 역시 ‘가드레일 조항’으로 첨단 반도체 장비와 기술의 흐름을 묶어두며 우방국에 정치적 결단을... 반도체·배터리 등 11개 핵심품목들을 특정 중요물자로 지정해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만...

[박소영의 시선] 당연한 것들의 유료화, ‘경제 요새’의 시대 왔다

박소영 논설위원

호르무즈해협이 닫혔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로 봉쇄된 이 좁은 수로는 단 몇 주 만에 전 세계 경제를 멈춰세웠다. 세계 원유 유동량의 20%, LNG의 상당량이 오가는 경제적 혈관이 막히자 국제 유가는 치솟았다. 글로벌 물류도 멈췄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항행의 자유를 보장받던 공해에서 ‘통행세’를 걷겠다는 이란의 선언이다.

호르무즈해협발 지정학 청구서

탄소에서 기술까지…장벽 높아져

일본 경제안보 방식, 시사점 던져

이란이 던진 ‘통행세’ 카드는 상징적이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는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국경의 장벽이 낮아진 자유무역질서 아래 기업들은 가장 싼 곳에서 만들고 가장 빠른 길로 물건을 나르는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호르무즈해협 봉쇄는 이 효율적 시스템이 지정학적 변수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구간마다 멈춰서서 높은 통행료를 내야 하고, 검문소마다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경제 요새’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 새로운 장벽 중 첫째는 전략적 요충지의 사유화다. 이란의 통행세는 시작일 뿐이다. 북극항로의 통제권을 쥐려는 러시아, 운하 통행료를 무기로 삼는 이집트와 파나마, 나아가 데이터가 흐르는 해저 광케이블에서 위성 궤도에 이르기까지, 과거 국제 공공재로 여겨졌던 공간들이 이제는 막대한 비용을 내야 하는 사유지로 변모하고 있다.

둘째는 ‘도덕적·환경적 검문소’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나 아동노동, 강제노동, 환경 파괴를 망라하는 ‘공급망실사법’은 더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겉으로는 지구 환경과 인권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특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국가의 제품을 걸러내는 고도의 ‘기술적 안전통행세’다. 이제 글로벌 시장에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압도적 기술력은 기본이며, 그들이 요구하는 ‘윤리적 입장료’를 감당할 수 있는 막대한 자본력과 관리 능력이 필수적이다.

셋째는 자원과 기술을 볼모로 잡는 ‘공급망 무기화’다. 가장 노골적인 사례는 중국의 핵심 광물 수출 통제다. 전기차 배터리와 스마트폰 제조에 필수 자원인 희토류를 무기 삼아 상대국의 산업 기반을 흔드는 방식이다. 인도네시아가 니켈 공급을 빌미로 자국 내 공장 설립과 기술 이전을 압박하는 전략은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 미국 역시 ‘가드레일 조항’으로 첨단 반도체 장비와 기술의 흐름을 묶어두며 우방국에 정치적 결단을 요구한다. 자원을 쥐고 기술을 통제하며 상대의 핵심 역량을 탈취하거나 진입을 막는 이 방식은, 과거의 자유로운 교역 질서가 어떻게 ‘약탈적 협상’으로 변질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정학자인 피터 자이한은 저서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에서 미국이 보장하던 ‘공짜 안보’의 시대가 끝나면 스스로 항로를 지키고 공급망을 완결지을 수 있는 국가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일본은 이 경고를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국가다. 일본은 센카쿠열도 분쟁 국면에서 중국발 공급 충격을 경험한 뒤 경제안보 차원의 컨트롤타워를 마련했다. 2021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장관)을 두고 이듬해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하며 국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경제 요새’로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반도체·배터리 등 11개 핵심품목들을 특정 중요물자로 지정해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만 TSMC를 구마모토에 유치하기 위해 약 1조2000억 엔(약 11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쏟아붓고,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를 통해 2나노 공정 국산화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외부의 ‘통행료’에 휘둘리지 않는 전략적 자급자족형 요새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일본은 또한 민간 기업의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비공개 특허 제도’를 도입했다. 국가 안보에 직결된 기술은 특허를 출원하더라도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며, 이를 어길 시 처벌까지 감수하게 한다. 공급망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를 지원하는 리쇼어링에도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장벽이 세워진 뒤에 대응하면 이미 늦다는 일본 특유의 치밀한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의 프리패스는 끝났다. 모든 연결이 곧 비용이자 무기가 되는 시대, 자원 빈국인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하다. 단순히 물건을 잘 만드는 수준을 넘어, 누구도 우회할 수 없는 ‘기술적 급소’를 쥐는 것이다. 타인의 통행료 징수에 흔들리는 대신 우리와 협상할 수밖에 없는 독보적 가치를 선점해야 한다. 이번 호르무즈 봉쇄는 일시적 돌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생존 문법의 예고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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