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B잡
ESG
금융·증권
비즈
과학/IT
생활·경제
정치
스페셜기획
사람들
이야기쉼터
전국
미네르바의 눈
시큐리티팩트
MICE
섹션 선택
섹션 선택
이동
[민병두의 job史 (11)] 서기관과 필경사, 기록으로 권력을 쥔 사람들
민병두
입력 : 2026.04.07 07:00
ㅣ 수정 : 2026.04.07 07:00
서기관은 결코 굶주리지 않는 자
이집트에서는 신에 가까운 존재
조선의 서기관은 왕도 못 건드려
[사진=구글 제미나이] 메소포타미아 시대 서기관 상상도
[뉴스투데이= 민병두회장] 인류가 역사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문자의 발명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자를 다루는 전문 계층이 등장했다. 바로 서기관(Scribe)이다. 이후 지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텍스트를 창조하는 서기관과, 기존 텍스트를 정확하게 복제하는 필경사(Copyist)로 직업이 나뉘었다.
기록은 왜 생겨났을까.
메소포타미아에서 글쓰기는 거창한 이유로 시작되지 않았다. 가축과 곡물을 세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8000년경, 사람들은 수량을 나타내기 위해 점토 토큰을 사용했다. 그러다 기원전 3200년경 이것이 점토판 위의 기호로 바뀌었다. 회계가 문자를 만든 것이다.
이 추상화 과정은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구했고, 이를 전담하는 서기관 계층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대장장이가 철을 다뤄 물질적 혁명을 이끌었다면, 서기관은 그 성과를 기록하고 세금으로 환수하는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철의 힘이 쇠를 두드려 만들어졌다면, 권력의 유지는 서기관들이 작성하는 장부와 법전 위에서 가능했다.
메소포타미아 서기관은 어떻게 길러졌을까.
서기관을 양성하는 전문 교육 기관이 있었다. 에두바(Edubba)라고 불렸다. 학생들은 약 8세에 입학해 20대 초반까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점토판을 굽고 첨필을 깎는 것부터 시작해 수백 개의 쐐기문자를 익히는 과정까지, 오늘날로 치면 의대에 가깝다.
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의 자제들뿐이었다. 서기관은 "결코 굶주리지 않는 자"로 불렸고, 궁전의 고위 서기관은 국왕의 최측근으로 국가 기밀을 다뤘다. 지식의 독점이 곧 권력이었다.
이집트에서 서기관은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이집트에서 서기관은 세슈(Sesh)라 불렸다. 뜻은 "그리다" 혹은 "창조하다"다. 기록이 곧 세계를 구현하는 신성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들의 특권은 막강했다. 군 복무 면제, 납세 의무 면제, 육체노동 면제. 피라미드를 짓는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고, 사원의 제례를 기록했다. "서기관이 되어라"는 당시 청년들에게 최고의 출세를 권유하는 말이었다.
이집트 서기관은 문자도 두 가지를 써야 했다. 신전과 기념비에 새기는 웅장한 성각문자(Hieroglyphs)와, 행정 업무에 쓰는 빠른 초서체인 신관문자(Hieratic)다. 두 가지를 모두 마스터해야 진짜 서기관이었다.
그렇다면 필경사는 왜 따로 생겨났을까.
서기관이 텍스트를 창조하고 법을 제정하는 지식의 소유자였다면, 필경사는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퍼뜨리는 정보의 매개자였다. 이 분화는 세 가지 이유로 일어났다.
첫째는 종교적 정통성이다. 유대교의 소페림(Soferim)이나 초기 기독교의 필경사들은 신의 말씀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보존해야 했다. 이들은 텍스트의 해석자가 아니라 원형을 지키는 기술적 복제자였다.
둘째는 행정 수요다. 로마 제국처럼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려면 공문서와 법령의 복제본을 전국에 뿌려야 했다. 정해진 양식대로 문서를 베껴 쓰는 전문 인력이 필요해진 것이다.
셋째는 상업적 도서 시장이다. 고대 로마에서 책을 소유하는 것은 문화적 지위의 상징이 되었고, 노예 출신의 교육받은 필경사들이 책을 대량으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서기관은 지배 계급이었지만, 필경사는 기술직이거나 심지어 노예인 경우도 많았다. 서기관이 법률적 판단을 내리고 고위직을 역임했다면, 필경사는 텍스트의 길이에 따라 보수를 받는 일종의 복사 기계였다.
중세 수도원 필경사의 삶은 어땠을까.
중세 유럽에서 지식 보존의 최전선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안에는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는 필사실이 있었고, 수도사들이 그곳에서 하루 종일 원고를 베껴 썼다. 조건은 가혹했다. 무릎 위에 원고를 올려놓고 앉아서 작업했다. 시력이 나빠지고,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고, 추위와 싸웠다. 책 한 권을 완성한 후 여백에 이런 탄식을 남기기도 했다. "손가락 세 개가 글을 쓰지만 온몸이 고통받는다."
그들에게 필사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신에게 다가가는 고행이었다.
필경사는 실수도 했다.
수만 단어를 손으로 옮기다 보니 오류가 생겼다. 단어를 빠뜨리거나, 줄을 건너뛰거나, 같은 단어를 두 번 쓰거나. 더 흥미로운 것은 의도적인 수정이었다. 영리한 필경사는 원고에서 문법적 오류나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면 스스로 고쳤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원본의 의도를 왜곡하기도 하고, 반대로 소실된 의미를 재건하기도 했다.
중세 영국의 브루트 연대기는 수십 명의 필경사가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현대의 위키피디아처럼 공동으로 창작된 역사서가 되었다. 담당 분량이 너무 일찍 끝나면 그 뒤의 역사를 직접 써 넣기도 했다. 필경사는 복제자를 넘어 텍스트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편집자였다.
조선의 서기관은 왕도 건드리지 못했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기록 시스템을 가진 나라 중 하나였다. 사관(史官)은 왕의 모든 언행을 사초(史草)에 기록했다. 왕이라도 사초를 열람할 수 없었다. 법으로 보장된 것이었다.
태종이 사냥 중 말에서 떨어지자 이를 기록하지 말라고 명했다.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왕이 말에서 떨어졌으며, 이를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다." 서기관적 사명감의 정점이다. 권력을 기록하는 자가 권력을 감시하는 도덕적 권위까지 가진 것이다.
반면 행정 문서를 작성하고 복제하는 일은 중인 계급의 몫이었다. 전문적인 필법과 행정 지식을 가졌지만 신분이 세습되는 기술직이었다. 조선에서도 서기관과 필경사의 위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구텐베르크가 모든 것을 바꿨다.
1460년대 인쇄기의 확산은 서기관 문화를 뿌리째 흔들었다. 수개월 걸리던 일을 며칠 만에 해냈고, 정확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수도원과 필경사 길드는 인쇄기를 악마의 기계라고 불렀다. 그러나 경제적 논리는 냉혹했다. 책값이 떨어지고 문해력이 대중화되면서 손으로 쓴 문서의 희소 가치는 사라졌다. 서기관 계급은 몰락했지만, 그들의 기술은 식자공, 교정자, 출판업자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흡수되었다. 대장장이가 산업혁명 이후 자동차 정비공과 기계 기술자로 진화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이러니가 있다. 인쇄술이 오류를 없앴지만, 동시에 필사의 정성이라는 종교적·예술적 차원도 사라졌다. 서기관 시대에 모든 책은 유일무이한 예술품이었다. 인쇄 시대에는 규격화된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텍스트들이 대량 복제되어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기관과 필경사는 글자를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권력의 설계자였고, 지식의 수호자였으며, 신의 목소리를 지상에 고정시키는 매개자였다. 쐐기문자에서 잉크로, 인쇄기에서 반도체 칩으로 매체는 바뀌었다.
오늘날 AI 전사 도구들은 수백 년 된 필사본의 흘림체를 몇 초 만에 해독하며 현대판 필경사 역할을 하고 있다. 디지털 아키비스트들은 하드드라이브가 구식이 되기 전에 데이터를 새 매체로 옮긴다. 필경사들이 닳아버린 파피루스를 새 양피지에 옮겨 적던 것과 본질이 같다.
기록의 주체는 인간에서 기계로 바뀌었지만, 정보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달하려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서기관들의 격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