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엔진서 데이터센터 심장부까지··· 산업 경계 허무는 K조선 대전환
HD현대중공업, 6000억대 수주··· ‘데이터센터용 엔진’ 새 시장 열었다
불황 없는 AI 사이클에 올라탄 K조선, 수주 산업 넘어 성장 산업으로
전 세계를 휩쓴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이 전력이라는 새로운 병목에 직면하면서 산업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전 세계를 휩쓴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이 전력이라는 새로운 병목에 직면하면서 산업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 AI 한 번의 연산이 기존 검색 대비 수배 이상의 전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추정되면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국가 전력망을 압박하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조선사들은 선박용 엔진과 발전 시스템에서 축적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앞세워 AI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이 미국 에너지 인프라 개발기업 아페리온 에너지 그룹과 체결한 684메가와트(MW) 규모, 6271억원의 발전설비 공급 계약은 AI 시대 전력 인프라 시장 확대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는 단순히 사업 영역이 바다에서 육상으로 확장된 사건이 아닌 한국 조선업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선도하는 산업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1초도 멈출 수 없다··· 조선 기술, AI 인프라로 진화
2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조선업과 데이터센터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산업이 요구하는 핵심 가치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무중단 가동과 극한 신뢰성이다.
선박 엔진은 파고 10미터의 거친 북해에서도 영하 30도의 극지방에서도 수만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정지 없이 돌아가야 한다. 망망대해에서 엔진이 멈추면 그것으로 끝이다. 수리를 위해 항구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다. 단 1초의 전력 중단이 수억 건의 트랜잭션 손실과 시스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천 장이 동시에 처리하는 딥러닝 연산은 중간에 끊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두 환경이 요구하는 기술적 명세는 사실상 동일하다.
HD현대중공업의 힘센엔진(HiMSEN)이 선택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힘센엔진은 빠른 기동성과 순간 부하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피크 타임에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메인 전력망이 끊기는 순간 수 초 내에 최대 출력에 도달해 무정전 전원 장치(UPS)가 버티는 수 분의 공백을 메우고 장기적 전력 공급을 이어받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美 전력망 한계··· HD현대중공업, 분산전원 시장 진입
미국의 전력망은 수십 년 된 노후 인프라 위에 운영되고 있다. 새로운 송전선로 건설은 환경 영향 평가, 지역 주민 반대, 연방·주 정부 간 규제 조율 등 복잡한 절차로 인해 최소 5년에서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반면 AI 데이터센터는 설계에서 완공까지 18~24개월이면 충분하다. 데이터센터가 완공돼도 전력을 받을 송전선이 없는 사태가 미국 전역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선택한 해법이 바로 분산형 전원이다. 중앙 전력망의 확충을 기다리는 대신 데이터센터 부지 안에 자체 발전 설비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이 시장은 그간 캐터필러(Caterpillar), 커민스(Cummins) 등 미국 현지 대형 엔진 브랜드들이 독점해 왔다. HD현대중공업이 이 벽을 뚫고 대규모 수주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힘센엔진이 글로벌 티어(Tier) 1 수준의 기술력을 국제 시장에서 공인받았음을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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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사, AI 전력 시장서 다른 승부수
HD현대중공업의 성공적 진입은 경쟁사들의 움직임도 가속화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기업이 같은 시장을 전혀 다른 각도로 공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화오션은 에너지 생태계 전체를 노린다. 계열사인 한화에너지와 한화엔진(구 HSD엔진)과의 수직 통합을 토대로, 단순히 엔진 하나를 납품하는 것을 넘어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ESS), 가스 엔진을 하나로 묶은 턴키 전력망 솔루션을 데이터센터 운영사에 통째로 공급하는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고 있다. 이는 경쟁사가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수직 통합형 진입장벽을 구축하는 전략이다.
삼성중공업은 가장 긴 호흡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현재의 가스 엔진 시장을 경쟁사에 내주더라도, 10년 뒤를 지배할 소형모듈원전(SMR)과 수소 연료전지 기반의 무탄소 전력 공급 기술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이다. RE100 달성 의무를 진 구글·마이크로소프트·애플 등 빅테크의 장기 전략 파트너가 되겠다는 포지셔닝으로 AI 인프라의 핵심 동력원 자리를 선점하려 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들 기업의 전략은 단기 매출, 에코 시스템 장악, 미래 기술 선점이라는 세 축으로 나뉘며 서로 다른 시간 지평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경쟁··· 데이터센터 전력 탄소 전쟁
그러나 이 모든 기회의 이면에는 거대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탄소 배출 문제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등은 일제히 2030년 탄소 중립, 나아가 2040~2050년 넷 제로(Net-Zero)를 선언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급증할수록 이를 뒷받침하는 발전 설비의 탄소 발자국은 기업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의 핵심 지표가 된다. 단순히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에서 얼마나 깨끗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로 경쟁 축이 이동하고 있다.
한국 조선사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메탄올 엔진, 수소 혼소 엔진, 암모니아 엔진 등 차세대 친환경 추진 기술을 선박용으로 개발해 왔다. 이 기술들이 이제 육상 데이터센터로 이식되는 것은 기술 개발 비용을 분산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일거양득의 전략이다.
특히 폐열 회수 시스템(ORC)은 주목할 만하다. 엔진 가동 시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버리지 않고 추가 전력 생산에 재활용함으로써 추가 연료 소비 없이 에너지 효율을 10%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 이 기술은 동일한 전력을 생산하면서도 탄소 배출을 줄이는 실질적 수단이다.
다만 이번 HD현대중공업의 684MW 데이터센터용 발전설비에는 ORC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향후 기술 로드맵과 축적된 기술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K조선, 수주 산업 넘어 ‘플랫폼 산업’으로 도약
이번 변화는 조선업의 기업가치 재평가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전통적으로 조선업은 해운 경기라는 외부 변수에 따라 수주와 실적이 크게 흔들리는 전형적인 사이클 산업으로 분류돼 왔다. 이 때문에 주가수익비율(PER)도 낮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발전용 엔진 시장은 구조가 다르다.
선박은 인도 이후 추가 수익이 제한적이지만 발전소 엔진은 다르다. 설치 이후 20~30년에 걸쳐 정기 유지보수와 소모 부품 교체, 성능 업그레이드 등 애프터마켓(AM)에서 안정적인 수익이 발생한다. 여기에 AI 인프라 투자 사이클이 최소 10년 이상 이어질 장기 흐름이라는 점도 변수다. 데이터센터가 2~3년 주기로 차세대 GPU 클러스터로 교체되는 특성상 전력 수요는 선형이 아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조선사들이 AI 시대에 핵심 인프라 공급자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는 금광에서 금을 캐는 광부보다 곡괭이와 삽을 만드는 제조업체가 더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업계 한 관계자는 “조선업이 기존의 수주 중심 산업에서 벗어나 AI 시대 핵심 인프라 공급 산업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며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 전력을 공급하는 기업이 경쟁력을 갖는 구조에서 조선업이 축적해 온 기술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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