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태(원광대 석좌교수, 전 육군참모차장)
영국 북서부의 항구도시 리버풀은 문화 자산을 활용해 도시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대영제국 시절 세계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리버풀은 20세기 후반 제조업과 해운업의 쇠퇴 속에서 깊은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세계적인 밴드 비틀즈와 명문 축구구단 리버풀 FC라는 문화적 자산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 도시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리버풀은 “비틀즈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도시 전체의 매력적인 이야기로 확장해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오늘날 지역 소멸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 지방 도시들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제 시선을 익산으로 돌려보자. 한때 철도·산업·교육의 중심지였던 익산은 현재 산업 침체와 청년 인구 유출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익산이 주목해야 할 문화적 자산이 바로 이리(현 익산시) 출신의 예술가 김민기 선생이다. 김민기는 한국 대중문화예술사의 거목이자 민주화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시민들의 마음을 노래했다. 대학로 소극장 학전(學田)을 통해 수많은 청년 예술인을 길러냈다. 또한 음악극 <지하철 1호선>으로 서민들의 삶과 시대의 풍경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지난 2024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들은 고인의 이름을 앞세운 화려한 추모 사업이나 일회성 기념 사업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무대의 ‘뒷것’을 자처했던 김민기의 뜻을 존중한 표현일 것이다. 1980년대 전후 엄혹했던 시대를 건너왔던 세대는 김민기에게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다. 유족들의 이런 결정은 김민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과 미안함을 더하는 대목이다.
고인의 삶과 정신은 이제 일부 세대의 기억을 넘어 우리 사회가 함께 보존해야 할 문화적 자산이다. 최근 대한민국의 사회적 혼란은 김민기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역사의 고비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웠던 그의 노래와 정신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는 공동체 전체의 몫이다. 김민기를 기리는 일은 유족의 동의를 얻되, 단순한 추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생가 복원, 추모 거리 또는 공원 조성 등 과거 지향적인 방식을 넘어야 한다. 김민기의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김민기는 미술대학 출신으로 시각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음악에 심취했고, 나아가 극예술을 총망라한 종합 무대예술을 완성해낸 ‘원조 융합예술가’였다. 익산의 새로운 전략은 미술·음악·극예술을 아우르는 ‘융합예술’의 발전 틀 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서울 대학로에서 문을 닫은 소극장 학전(學田)의 정신을 익산에서 이어가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KTX가 교차하는 익산역의 접근성을 활용한다면 익산은 단순한 철도 환승지가 아니라 전국의 청년 예술인과 관객이 모여드는 문화 거점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주말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익산행 기차표를 끊는 도시, 그것이야말로 김민기가 꿈꾸었던 ‘배움의 밭(學田)’이 지역 속에 뿌리내리는 모습일 것이다. 전북의 다른 문화 자산과의 시너지도 기대할 수 있다.
둘째, 전국의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 거처와 장르 간 경계를 허무는 융합예술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 거점 대학인 원광대학교에 가칭 ‘김민기학과’를 설치해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삼아야 한다. 청년 예술가들이 익산의 유휴 공간과 산업시설을 무대로 장기 체류하며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시도해 볼만하다. 나아가 고인의 추모 시기에 맞춰 가칭‘익산 아침이슬 융합예술축제’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 도시의 활력을 되살리는 새로운 성장 전략이 될 것이다.
셋째, 학전과 한국 소극장 문화, 시각예술에서 공연예술로 확장된 청년 저항음악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기록·보존하는 디지털 아카이브(archive) 사업이 필요하다. 이미 정부와 문화예술계에서 김민기의 작품과 학전의 기록을 정리·보존하려는 기초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익산은 이를 적극 이어받아 지역의 문화 전략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유족들이 기록 보존 작업에는 가능성을 열어둔 바 있다. VR과 미디어아트 기술을 활용해 <지하철 1호선>의 공연과 <아침이슬>이 울려 퍼지던 시대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김민기 선생을 추모한다는 것은 그를 과거 속에 머물게 하는 일이 아니다.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 도시를 문화로 살리고, 소외된 청년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열어주며, 사람을 키우는 공동체를 다시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김민기의 삶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그 시절 청춘들이 지녔던 부채 의식을 가장 생산적으로 갚아나가는 방식일 것이다.
“고맙다. 할 만큼 다했다.”
담담히 시대를 건너간 거장에게, 이제 그의 고향 익산이 응답해야 한다. 그의 ‘배움의 밭’은 익산에서 다시 넓고 깊게 자라나야 한다. 그리고 그 밭은 한 도시만의 자산이 아니라 대한민국 공동체 전체가 함께 가꾸어야 할 문화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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