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에서 조계사까지 진행된 2026 연등행렬에 로봇스님인 가비, 석자, 모희, 니사 스님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THE Biz(더비즈)=정대환 기자] 불기 2570년 올해 부처님 오신날인 24일은 한국 불교계에도 새로운 역사가 기록된다. 로봇스님이 부처님 오신날 공식 석상에 첫 등장한 날이기 때문이다.
국내외 종교계에 전례 없는 '인공지능(AI) 바람'이 불고 있다. 영혼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종교가 최첨단 정보기술(IT)과 결합하면서 영성의 본질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도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지난 6일 휴머노이드 로봇이 불교 계율을 받는 국내 첫 로봇 수계식이 열렸다. 회색 장삼에 가사를 두르고 108염주를 건 키 130㎝의 로봇 'G1'은 이날 '가비'라는 법명을 받았다.
가비는 스님들과 발을 맞춰 사찰 마당을 도는 탑돌이를 하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등 정교한 동작을 선보였다. 도반 로봇 '석자', '모회', '니사'와 함께 16일 종로 연등행렬에도 참여했다.
수계식에서 가비는 삼귀의와 함께 로봇을 위해 따로 마련된 '로봇 오계'를 받았다. '생명을 해치지 말 것', '인간을 존중할 것', '에너지를 과충전하지 말 것' 등 기술과 인간의 공존을 불교적 언어로 풀어낸 계율이다.
집전을 맡은 전계대화상 철산 성웅 스님은 "유정무정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 하였으니 로봇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법문했다. 금속과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기계에도 부처가 될 성품, '불성'이 깃들 수 있느냐는 화두가 던져진 셈이다.
교토 고다지 신전에 있는 사제 로봇 민다르. 사진=AFP(연합뉴스)
◆늙지 않는 보살과 귀여운 동자승
불교계와 첨단 기술의 결합은 한국보다 일본과 중국에서 먼저 활성화됐다. 일본 교토의 선종 사찰 고다이지에는 2019년부터 로봇 '민다르'가 상주하며 법문을 전한다. 이시구로 히로시 오사카대 교수팀과 공동 개발한 이 휴머노이드 로봇은 알루미늄 골격과 실리콘 피부가 드러난 외형으로 약 25분간 반야심경을 설법한다.
도입 초기 종교의 상업화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사찰 측은 "관세음보살은 중생 구제를 위해 어떤 모습으로든 나타나며, 현대에는 그것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로봇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가자 감소와 초고령화로 존폐 위기에 놓인 일본 불교가 찾아낸 방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베이징 용천사는 더 대중적인 길을 택했다. 2015년 선보인 키 60㎝의 동자승 로봇 '시안얼'은 사찰이 만든 만화 캐릭터에서 출발했다. 가슴에 달린 스크린으로 신도와 일상의 고민을 상담하며, 방대한 불교 데이터를 바탕으로 위로를 건넨다.
지난 22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지 메카에서 연례 하지 성지순례를 앞두고 그랜드 모스크 단지에 모인 무슬림 순례자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가장 보수적인 성지 메카의 '코란 로봇’
기술의 침투는 불교계만의 일이 아니다. 엄격한 율법을 고수하는 이슬람교의 심장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에도 AI 안내 로봇이 배치됐다.
사우디 두 성지 관리청은 2022년을 전후해 코란 낭송·예배 안내 로봇과 율법 질문에 답하는 '파트와(이슬람 법령) 로봇'을 잇따라 도입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객(하지)이 몰리는 이곳에서 로봇은 성독(誦讀) 음성으로 이슬람 경전 코란을 낭송한다.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11개 언어로 율법 질문에 답하고, 필요하면 원격으로 종교학자를 연결한다. 언어 장벽과 대규모 인파 통제라는 현실적 한계를 기술로 돌파한 사례다.
사진=Unsplash
◆서구 기독교계 AI 영성 실험
유럽 기독교계는 신도의 내밀한 영적 영역까지 건드렸다. 2023년 6월 독일 퓌르트 성바울 교회에서는 독일 개신교 신자대회(키르헨타크) 기간에 생성형 AI 챗GPT가 설교문, 기도문, 음악 등 예배의 98%를 만들고, 대형 스크린 속 AI 아바타 4명이 진행하는 실험적 예배가 열렸다. 300여명이 참석했지만 다수 신도는 "감정도 바디랭귀지도 없어 영혼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반면 스위스 루체른 성 페터 예배당에서 2024년 두 달간 진행된 'AI 예수' 프로젝트는 뜻밖의 반응을 얻었다. 루체른 응용과학예술대 연구팀과 예배당 신학자가 함께 만든 이 설치물은 신약성경을 학습한 예수 형상의 아바타를 고해소에 배치하고, 격자무늬 스크린 너머로 100여개 언어의 1대 1 상담을 제공했다.
두 달간 900여건의 대화가 오갔고, 참여자의 약 3분의 2가 이를 '영적으로 긍정적인 경험'으로 평가했다. "기계인데도 큰 위로를 받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인간의 시선과 판단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차가운 알고리즘이 역설적으로 일부 현대인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통로가 됐다. 다만 "결국 눈속임"이라는 회의적 반응도 있었고, 운영진은 "고해성사가 아니며 인간의 대화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로봇 수계식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G1 '가비'가 스님들과 탑돌이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술의 시대, 질문은 다시 '인간의 본질’
알고리즘이 몇 초 만에 설교문과 법문을 찍어내고, 기계 사제가 국경과 언어를 넘어 위로를 건네는 시대다. AI가 종교의 영역마저 삼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지만,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번 실험들이 '인간의 본질'을 부각한다고 본다.
신도들이 로봇과 AI 종교인에게서 발견한 가치는 기술의 화려함이 아니라 '내 이야기에 대한 경청'이었다. AI 종교인의 등장이 인간 성직자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종교의 본령이 유창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만이 건넬 수 있는 '체온이 담긴 공감과 실천적 자비'에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부처님 오신 날 사찰 마당을 밝힐 연등 아래에서 인류가 마주할 것은 기계가 흉내 낸 영성이 아니다. 이웃의 아픔을 먼저 들여다보고 손을 맞잡는 '인간의 온기'야말로 기술의 시대에 되찾아야 할 영성이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