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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동양칼럼/ 예외를 못 견디는 사회

마을이 돌봄 공동체로 작동하는 것은 당연하고 거의 모든 역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중앙과 지역의 불균형을 바라보는 데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

동양칼럼/ 예외를 못 견디는 사회

이창우 소설가

마을이 돌봄 공동체로 작동하는 것은 당연하고 거의 모든 역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중앙과 지역의 불균형을 바라보는 데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이 넘쳐나는 수도권을 떠나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간 지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이 긴 세월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내가 매일 마주치는 지역 사회는 여전히 중앙의 논리로는 해석할 수 없는 시각을 요구한다.

국가가 준비하는 미래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싹튼 IT 강국의 초석이 여러 민주 정부를 거치며 국가 균형 발전과 부국강병의 실현 가능한 길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조급증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듯, 긴 호흡이 필요한 국가적 과제를 5년이라는 단임 정권 하나가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 성과주의에 조급해할수록 정책의 지속성은 끊어지고, 그로 인한 혼란과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주식과 부동산, 디지털의 미래, 뉴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이미지와 자극적인 소재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가난이라는 말 위에 ‘개인의 게으름‘이라는 신화를 덧씌우는 현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약자를 공격하기 쉬운 한국 사회는 이들을 무덤 같은 한계로 등 떠밀어 놓고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요구만 늘어놓는다. 온갖 지표를 끌어대 부정적인 면만 노출하는 행정부 수반의 모습은 그 대표적인 예다.

자기 검열로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사회, 기득권이 주도하는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개인은 고립이라는 섬에 갇히고 만다. 안타깝게도 수도권이든 지역이든 대한민국 곳곳은 힘의 논리라는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닫힌사회일수록 스스로 정당성을 증명하기에 바쁘다. 더 노력하라는 말에 분노라는 감정은 세대를 가르지 않는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은 예외적일 수밖에 없다.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거나 전혀 다른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학벌과 이력이 권력을 쥐어주는 데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거대 정당의 모습은 고무줄놀이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밖을 보지 못하고 안을 후벼 파는 비주류와 주류의 구별 짓기야말로 그들의 생리에 잘 들어맞는다.

전 정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각화된 사회 지표들은 정작 뉴미디어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대통령 지지율만을 내세워 사회를 판단하려는 현실 속에서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한 개인에게는 일종의 자기 위안이 되는 말이지만, 5,200만 명을 아울러야 하는 정부에는 적용될 수 없는 논리다.

방어기제가 본능처럼 솟구치는 한국 사회에서 자격지심 없이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마음에 묶이지 않으려는 내공을 쌓아갈 뿐이다. 한 주에 한 번씩 지지율을 통한 메시지가 이어지고 부동산 이슈가 끊임없이 던져지지만, 과연 그 이슈는 몇 퍼센트 사람들의 눈을 빛나게 할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단 한 번도 삶의 본질적 문제로 떠오른 적이 없다. 국가비상사태가 되어도 다른 세상 이야기로 태연하다.

국가 정책은 물론, 지속성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사업이 지역에서 방향을 잃거나 매몰비용을 담보로 멈춰 서는 경우는 허다하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공정하다는 착각‘은 이기적인 개인과 집단이 협력 대신 각자의 이해관계로 묶일 때 시작된다. 서로를 포용하기보다 각자의 이익만을 셈하는 구조 속에서, 한국 사회는 가을 아침에서 한낮으로 급하게 변하는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럽고 위태롭다.

사회가 규정한 정답인 고학력, 수도권 거주, 자산 증식, 주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삶을 ‘예외‘라 부른다면, 지역에서의 삶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중앙 중심으로 흘러가는지를 선명하게 체감하는 과정이다. 그저 ‘한 달 살이‘ 같은 단기 체험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이 깊은 괴리감은 세월이 흐를수록 스스로를 놀라게 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도생의 위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외를 인정하는 사회의 수용성을 키우고 끊어진 돌봄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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