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 먼 미래에 인공지능(AI)이 인류를 지배하는 설정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벌써 AI에게 지배당해 경영평가를 받는 기분입니다.”
공기업 관계자의 이 한마디는 올해 경평을 준비하는 현장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기업에게 경평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자리다. 지난 1년간 추진한 사업의 성과를 평가받고, 그 결과에 따라 직원들의 성과급 규모까지 결정된다. 기관 입장에서는 조직의 노력과 방향성을 검증받는 중요한 절차다.
경평을 둘러싼 현장의 고충은 매년 반복됐다. 평가위원들이 기관의 업무 특성과 산업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평가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기업들은 이를 일정 부분 감내해왔다.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외부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시선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제도의 취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이해는 각 기관들의 적극적인 설명과 소통으로 보완했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경평 준비 과정에서 현장의 불만이 예년보다 뚜렷하게 표출되고 있다.
일부 평가위원들의 질의에서 AI 사용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서다. 특히 AI 활용 과정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할루시네이션(환각)’ 현상이 질의 내용에서도 발견된다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기관이 제출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질문이 이뤄져야 함에도, 보고서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나 용어가 등장하는가 하면 맥락과 맞지 않는 질문이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사례도 있다는 게 한 공기업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는 단순한 착오의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의 검토 없이 AI가 생성한 내용을 그대로 활용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기관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수준을 넘어, 아예 관심과 검토 자체를 AI에 맡겨버린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걸러낼 수 있는 질문조차 그대로 전달되는 상황은, 경영평가의 출발점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할루시네이션이 개입된 질의는 평가의 신뢰성을 근본부터 흔든다. 존재하지 않는 내용을 전제로 한 질문에 대해 기관이 해명해야 하는 상황은 담당자의 피로와 불필요한 소모를 낳는다. 정작 핵심이 돼야 할 기관의 성과와 과제에 대한 논의도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문제의 본질은 ‘AI를 썼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있다.
AI는 방대한 자료를 빠르게 정리하고 핵심을 추출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경영평가처럼 대량의 보고서를 다뤄야 하는 과정에서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오히려 적절히 활용한다면 평가의 효율성과 일관성을 높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보조’가 아닌 ‘대체’에 가깝다. 보고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AI가 생성한 질문을 그대로 던지고, 그 질문의 적절성조차 확인하지 않는다면 이는 평가라기보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공정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로 출발한 경영평가가 오히려 ‘무책임한 자동화’로 흐르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전제가 흔들린다면, 현행 경평 시스템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AI 시대에 평가 방식이 변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기술이 판단을 대체하는 순간, 제도는 껍데기만 남는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책임과 검증 과정이다.
경영평가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공공기관의 방향을 설정하는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이 검증되지 않은 AI의 결과물에 의존한다면, 결국 피해는 공기업만이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 전체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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