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냉전 이후 물건을 만드는 능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실수(terrible mistake)를 저질렀다.”
이달 초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제조업의 쇠퇴를 두고 이런 뼈아픈 자성을 내놨다. 반도체, 국방, 에너지 등의 첨단 제조 인력을 육성할 ‘파운드리 스쿨(Foundry School)’ 출범식에서다. 제조업 부흥을 외치는 루비오 장관의 발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년 전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그는 베이징이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무너뜨리겠다는 목표에 다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숙련 인력과 제조 생태계를 잃어버린 미국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제조업 생태계 붕괴 조짐
루비오의 자성은 요즘 한국 상황에 비춰보면 경고처럼 들린다. 물론 한국은 ‘아직은’ 제조 강국이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분야에서 첨단 수준의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시선을 밑으로 굽어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현실이 펼쳐진다. 제조업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는 중소기업의 현실이 특히 끔찍하다.
올해 1분기 수도권에서 경매로 나온 공장은 1526개. 외환위기 이후 가장 많은 물량이다. 지난해 국가산업단지에서 휴·폐업한 기업도 1090곳으로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17년 이후 최대다. 이를 산업 환경 변화와 시대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도태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저비용과 고효율만 좇은 이런 안이한 판단이 미국의 패착이었다.
경기 시화국가산업단지에는 냉간단조 공법으로 차량용 샤프트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있다. 처음에는 대당 수억원이 넘는 중고 독일 설비로 제품을 생산하다가 10여 년에 걸쳐 작업 현장에 맞게 제어장치를 개조하고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국산화했다. 동종업계에서 이 회사만 지닌 경쟁력이다. 전국 제조 현장에는 이런 무명(無名)의 중소기업이 곳곳에 널려 있다. 반도체, 자동차 강국의 위상이 유지되는 건 이런 기업들이 버티고 있어서다.
국내 제조업 생태계의 붕괴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제조업의 근간인 금형, 열처리 등 뿌리산업은 고령화와 인력난에 신음한다. 핵심 기술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는 업체가 10곳 중 4곳에 이른다는 게 중소벤처기업부의 진단이다. 이 와중에 중국의 저가 공습은 거세지고 있다.
하이엔드, 로엔드 모두 중요
선반과 밀링, 소성가공 업체가 몰려 있어 제조업의 실핏줄 역할을 하는 서울 문래동 일대 마치코바(町工場·영세 공장)는 개발 압력에 밀려 쫓겨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이곳을 통째로 옮겨야 한다는 호소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인공지능(AI) 분야와 창업에만 매달리는 듯한 정부를 바라보는 제조 현장의 속내는 허탈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주 52시간 근로제 등 세밀하지 못한 노동 규제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린 게 정부다.
하이엔드뿐 아니라 암묵지(暗默知)가 쌓인 로엔드 영역까지 지속 가능해야 유지될 수 있는 게 제조업 생태계다. 피지컬 AI는 양질의 부품이 있어야 돌아간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미국처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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