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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대구의 뿌리를 찾아서-달성군] (29) 화원(花園), ‘청춘 로맨스의 핫플레이스’...“선현께서 감상하셨던 이곳, 그 이름 향기롭기만 하구나”

이제 화원은 유치원생들이 소풍 오는 화원 꽃동산이 아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청춘에게 쉼터(shelter)가 되어주는 ‘청춘 로맨스의 핫플레이스(Hot Place of Youth Ramance)’다.

인흥마을의 평온함과 풍요로움을 표현한 모습.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이제 화원은 유치원생들이 소풍 오는 화원 꽃동산이 아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청춘에게 쉼터(shelter)가 되어주는 ‘청춘 로맨스의 핫플레이스(Hot Place of Youth Ramance)’다. 여기서 ‘청춘(靑春, Youth)’이란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1840~1924)의 시로 답하면,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따라서 화원에는 “가슴 떨리는 사람만 오지, 다리 떨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는 황금율(黃金律)이 있다.

지난 2014년 SBS 스페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속, 재열(조인성)과 해수(공효진)가 대구에서 상경하기 전 틈새시간에 잠시들렀던 화원 산책길에서 다정하게도 걸었던 숲속 오솔길 -청춘의 가슴 설레는오솔길(the heart-fluttering path of youth). 드라마의 전체를 녹아 냄 (concept)은 “우리가 그렇게 이상해? 삶과 사랑에 대해 마음의 상처와 병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괜찮다고, 이상한 게 아니라. 조금 특별 했구나라고 말하는 마음 따뜻한 이야기(Are we really that strange? A heartwarming story that tells us, who live with the wounds and illnesses of our hearts about life and love, that it’s okay, that we‘re not weird, but a little special).”를 담았다.

옛날 선인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화원십경(花園十景)’이란 10대 비경이 있는데, 상화대(賞花臺) 시비(詩碑)에 적혀있는 세칭 ‘상화대십경(賞花臺十景)’은 i) 돛단배는 낙동강 물 돌아가고(洛水歸帆) ii) 금호강에선 고기잡이보다는 피리를 부는데(琴湖漁笛) iii) 기러기 제비 바위에 내려앉고(淵巖落雁) iv) 저녁밥 짓는 연기는 다산을 감도는구나(茶山炊煙) v) 드넓은 들판엔 밭갈이 농부의 노랫가락 흥얼거리네(大坪耕歌) vi) 삼포 사문진 나루터는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네(三浦秋色, 세물거리 나룻터) vii) 가을 석양은 가야산을 감싸고 물들이고 있다나(伽倻落照) viii) 구름아 비슬산에 그대로 머물러라(琵瑟宿雲) ix) 이곳 화원의 꽃들은 한창 핀 늦봄 같은데(花臺慕春) x) 이젠 눈에 익은 사문진, 강물엔 달빛이 길게 드리운다(老江月柱).”라고 썼다.

대구의 큰 선비(巨儒)였던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의 작품을 1931년에 발간된 ‘임재문집(臨齋文集)’에서 ‘낙동강 배타고 화원 언덕을 감상하면서(舟遊洛江賞花臺)’를 딱 한구절만 옮겨보면 “…옛 선현께서 놀이하고 감상하셨던 이곳 천년 토록 그 이름은 향기롭기만 하구나(前修遊賞地千載姓名香).”

우리는 1938년 장편소설 ‘대지(The Good Earth)’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Pearl S Buck, 1892~1973. 한국명 朴眞珠)이 1960년 경주를 방문하고, 1963년에 ‘살아있는 갈대(A Living Reed)’를 썼다고만 알고 있다. 그러나 펄벅의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를 읽어보면 많은 구절에서 화원(花園)의 한국적 평온함과 대명유수지(大明遊水池)의 갈대를 연상하게 한다. 특히 “살아있는 갈대를 그리려, 강변을 거닐며, 손끝에 바람을 얹는다. 은빛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갈대는 마치 속삭이듯 지난날을 노래하네. 강 위를 스치는 돛단배, 물길을 읽으며, 느릿하게 흘러가고, 늦봄 언덕엔 만개한 꽃들, 한점의 붓터치처럼 피어 있다. 하늘엔 한가로운 구름이 떠돌고, 눈을 들면 아스라이 보이는 비슬산(Biseul Mountain). 그 자태 고요하여, 바람도 머물다 가는 그곳. 이 순간을 책에 담을 수 있을까? 흔들리는 갈대처럼, 시 한 줄에 숨결을 담을 수 있을까(Can this moment be bound in a book? Like the trembling reeds, can a single verse hold its breath)?”라는 고민을 담았던 창작비망록(創作備忘錄)을 남경대학펄벅기념관(Nanjing University Pearl S. Buck Memorial House)이 소장(所藏) 중이다.

◇화원 주변의 뛰어난 역사적 풍광

세계사(世界史)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을 배운다. 서아시아(西亞細亞)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중심 지역에서 발흥한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우리말로는 삼각주(三角洲), 삼파진(三波津), 세물나루터(三水津)이다.

신라 때부터 삼파진(三波津) 부강정(浮江亭)이 있었다. 위치는 오늘날 강정 마을 앞, 2012년9월 20일에 개관한 ‘디아크 문화관(The Arc : Artistry of River Culture)’ 터전에 신라 국왕들이 화원(花園)의 사문진(沙門津)과 강정(江亭)의 삼파진(三波津, 일명 三浦)을 오가면서 선유를 통해 ‘군자의 요수지기(樂水之氣)’를 받아 갔던 곳이다. 지역 선비 윤대승(尹大承, 1553~몰년미상)이 건립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파손되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에 중수했던 부강정(浮江亭·논공읍 약산 덧재길 221(하리 160번지)에 있는 부강정은 조선후기 재실로 사용되고 있던 정자였으며, 400여년 전 윤대승(尹大承, 1553~몰년미상) 선비가 향리, 선비들과 학문을 연마하면서 휴식공간으로 사용하였으나. 1947년에 이곳 자리로 이건했다. 이전에 위치는 성주군 상곡(上谷)에 있었다. 오늘날 강정 마을의 촌명(村名)은 부강정(浮江亭)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때 부강정(浮江亭) 앞에 놀이 배(遊覽船)가 정박했던 세물 나루터(三波津, 三水津 혹은 三浦)가 있었다. 낙동강 상류가 금호강 물과 하나 되어 낙동강 하류로 흘러갔기에 이곳을 세물 나루터(三波津)라고 했다. “신라 국왕들의 놀잇배는 사문진(沙門津)과 삼파진(三波津), 그리고 금강정(錦江亭)과 부강정(浮江亭)을 신라 비단 조하주(朝霞紬)의 베틀 북처럼 오고 갔었을 것.”이라고 908년 10월경 이곳에 들렸던 최치원(崔致遠, 857~913)은 옛 정경(情景)을 시구절로 회상했다. 오늘날도 당시의 화원(花園)과 강정(江亭)의 금호강·낙동강 비경을 4자성어로 ‘삼사금부(三沙錦浮)’라고 줄여 말하고 있다.

◇인흥사(仁興寺)에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뼈대를 잡다

화원읍(花園邑) 바닥 동네(本里)에 산야가 넉넉함을 보면, i) 이곳에서 산출되는 물산(物産)과 생리(生利)가 풍요롭고, ii) 이로 인한 인정과 심덕이 순후한 사람들이 살아왔던 곳이라, 동네 이름조차도 범상한 인흥(仁興)마을이다. 오늘날 이곳에 남평문씨인흥세거지(南平文氏仁興世居地)로 터전을 잡아 터줏대감을 하고 있다. 인흥(仁興)이란 동네명은 통일신라 고찰 인흥사(仁興寺, 창건연대 미상)에서 유래되었다.

원래는‘인홍사(仁弘寺)’였으나 1264년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이 포항 운제산(雲悌山, 482m) 오어사(吾魚寺)로 내려왔으며, 인홍사(仁弘寺) 주지 만회(萬恢)의 초청으로 44세에 23년간 정이 들었던 포산을 떠났다가 14년 만인 59세에 2차 포산 ‘인흥사(仁興寺)’로 옮겨, 1268년 인홍사를 중수하고, 인흥사(仁興寺)로 개칭하고, 충렬왕의 금서사액(金書賜 額)을 받아 걸었다. 이곳에서 11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뼈대를 마련했다. 오어사(吾魚寺) ▷ 인흥사(仁興寺) ▷ 인각사(麟角寺) ▷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 과정과 내용을 ‘보리 개떡 5개와 물고기 2마리(五餠二魚)’에 비유하고 있다. 현재 수봉정사(壽峰精舍)가 보각국사(普覺國師)가 있을 때 인흥사(仁興寺) 대웅전(大雄殿)의 터로 짐작된다. 일연선사(一然禪師)가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중수하여 인흥사(仁興寺)로 개칭하였다.

고려 말 경산목(京山牧, 朝鮮時代 星州牧) 출신이며 여말사은(麗末四隱)의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포산 어느 사찰(苞山寺刹)에서 과거 준비를 했으며, 포산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던 ‘시골살이(村居)’라는 한시에서는 “단풍잎이 작은 길을 밝히고, 맑은 샘물은 돌부리까지 씻으며 흐르네(淸泉漱石根), 후미진 곳이라 찾는 이는 없고, 산 기운은 절로 붉어지네(山氣自黃昏).”라고 노래했다. 이수광(1563~1629)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도은(陶隱)이 그림(仁興寺)을 보고 ‘승사를 소제로(題僧舍)’ 한시를 지었고, 스승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으로부터 ‘중국시인을 뺨치는 시풍(逼唐)’의 한시(漢詩)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로 인해 당대에 문성(文聲)을 얻었다(牧隱見之以爲逼唐名聲遂成).

그럼 그 시를 읽어보자, “산은 여기저기 오솔길 나눠진데, 송홧가루 비에 젖어 하늘하늘 아롱진다. 스님은 우물에 물 길러 절로 들어가고, 한 줄기 푸른 안개 흰 구름을 물들이네.”

인흥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소실되었다. 16세기경에도 ‘여지도서(輿地圖書)’ 성주목(星州牧) 불우조(佛宇條)에 인흥사(仁興寺)를 기록하고 있다. 18세기까지는 존속되었다. 따라서 인흥사의 창건운영(創建運營)은 불탑(佛塔), 유물(遺物) 및 유적(遺蹟)을 종합할 때 고려 전기에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700여년간 중생구제(衆生救濟)의 터전이 되었다.

글·그림=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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