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이 우주와 인생섭리를 말한다면, 인흥서원은 이를 강의하는 인생대학강의실과 같다.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여송(李如松) 등의 명나라 지원군(大明天軍)이 조선에 와서 왜병과 전투는 뒷전에 두고, 명군 깃발에 “황제의 깃발이니 조선 국왕도 고두례(叩頭禮)를 올려라.”라고 거만을 피웠다.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좋은 게 좋다고 고두례(叩頭禮)까지 했다. 밉다고 하면 업어달라는 꼴이었다. 매일 밤 잠자리에 ‘꽃 같은 처녀(花樣女)’를 요구하는 바람에 유성룡은 그만둘 마음까지 먹었다.
그 때에 “부처님의 밑구멍을 들어보면 거미줄이 보인다(If you look into the Buddha’s buttocks, you can see a spider web).”고 했듯이 대명제국(大明帝國)의 치부(恥部)를 밝혀내고자 조선 조정은 비밀리(秘密裏)에 스파이 프로젝트(spy project)를 전개했다. 종전 후 대명제국에 “조선의 국초에 황제의 은혜로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하사받아 지성으로 대국을 섬겼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변고에 동쪽으로 구원군을 내어 주셨기에 다시 나라를 세우는 덕분(再造之恩)임은 곤충과 초목까지 황제의 신령함을 어찌 입지 않았겠습니까?”로 사례(謝禮)를 올리러 따라갔다 온, 한 마부의 비망록(備忘錄)이 발견되었다.
대명건국(大明建國)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해 개국공신이 된 추유(秋濡, 1345~1404)는 바로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쓴 추적(秋適, 1246~1317)의 친손자라는 사실이다. 추유(秋濡)가 주군(主君)으로 섬겼던 주원장(朱元璋)은 가혹한 조세 수치로 부모는 이미 기아로 사망했는데, 17세 때 온 동네가 가뭄, 병충해, 전염병이 돌아 형제까지 잃었다. “하나 남은 형은 마지막 남은 쌀알 13개로 죽을 끓여 막네 중팔(重八, 주원장의 아명)에게 넘겨준 뒤에 굶어서 죽었다(唯一生兄,以十三米粥,給弟重八,然後餓死).” 그에게 남은 오기는 시쳇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4년간 탁발승(托鉢僧)을 했으나 그것으로도 살 수 없었다.
주원장(朱元璋)에겐 은인이 많다. i) 부모의 무덤을 쓸 텃밭 모퉁이를 내주신 후덕한 이웃 어른 유계조(劉繼祖), ii) 17살 때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다고 찾아간 황각사(皇覺寺), 고빈(高彬) 스님께서“황각사 주지를 목표로 두지 말아라. 탁발승(托鉢僧)으로 민심을 살피고, 뜻을 세우는 곳에 몸을 투신하라”고 했다. 어느 날 굶은데다가 지쳐서 돌아오는 길목에 팔자풀이 점쟁이(破字占術家)에게 공짜로 “물을 문(問)”를 짚었고, “우군좌군(右君左君)하니 군왕지상(君王之相)이거나 아니면 문전걸식(門前乞食) 걸인지상(乞人之相)이다.”라고 사주풀이를 받았다. 끝내는 백련교(白蓮敎)를 믿던 농민들이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홍건적(紅巾賊)에 들어가 두목 곽자홍(郭子興, 1302~1355)에게 인물됨을 인정받았다.
주원장은 홍건적(紅巾賊)에 들어가 망나니 삶을 살았지만, “비록 새우 잠을 자나 고래 꿈을 꾼다(Even though I sleep like a shrimp, I dream of whales).”는 마음으로 그의 마음속에는 ‘해와 달의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治日月大國之皇帝)’라는 복안을 가졌다. 흉노족을 규합하고,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고려) 국경을 넘나들었다. 이 야욕에 방아쇠(triger)를 당긴 액션플랜(action plan)을 제공했던 사람이 바로 추유(秋濡)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주원장이 국호(國號)를 건국 책사 추유(秋濡, 1345~1404)의 조부이신 추적(秋適-충렬왕 초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龍州)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安珦)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李晟)·최원충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다.)이 쓴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 ‘밝을 명(明)’를 따왔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1985년 추씨국제화수회(秋氏國際花樹會)에서 편찬한 “추씨구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는 송 승려 담수(曇秀)가 서문에 1230년(발문에선 1290년)에 저술한 ‘인천보감(人天寶鑑)’을 벤치마킹하여 1305(충렬왕 31)년 국학교수(國學敎授) 추적(秋適)이 교양서로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집록했다. 그의 손자 추유(秋濡)가 1363년 중국에 귀화해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1368년에 대명제국(大明帝國)이란 개천(開天)에 일등 공신으로 병부시랑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있을 때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보급했다.
◇화원(花園)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실 명심보감을 화원에서 저술한 것도 아니고, 저자 추적은 1246년 양광도(楊廣道) 양지현(陽智縣)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양지면(陽智面)에서 태어났고, 저술은 고려시대 왕도 개성에서 국학교수로 관리를 교육하면서 했다. 죽은 뒤에 묘소는 용인시(龍仁市) 기흥구 공세동에 있다. 뿐만아니라 1453년10월 10일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삼강오륜이 무너짐을 개탄한 청주목(淸州牧)에서는 온 백성 윤리교과서(倫理교과서)로 중국인 범입본(范立本)이 쓴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대자명심보감(大字明心寶鑑)’이란 이름으로 목판본을 유인 보급했다.
그런데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730번지에 1866(고종 3)년 9월 20일 인흥서원(仁興書院)을 건립하고 추적 선생을 봉향하고자, 문헌사(文顯祠) 사당, 판목과 서적을 보관하는 장판각(藏版閣)을 세웠다. 오늘날 서원 입구에 추적(秋適)의 신도비각(神道碑閣)과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명심보감 판본(明心寶鑑 板本)’은 1869(고종 6)년 추적(秋適)의 20세손 추세문(秋世文)이 국역 출판한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인흥재사본(仁興齋寫本)이었다. 1971년 12월13일 인흥서원(仁興書院) 대들보(大梁)에서 명심보감(明心寶鑑) 목각본판목(木刻本板木) 31매가 발견되었다. 간기(刊記, 刊行記錄)에 “기사년(己巳年) 이곳 대구인흥재사(大邱仁興齋舍)에서 판본을 바로잡아 간행한다.”라고 적어놓았다. 명심보감 판본(明心寶鑑板本)은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대구시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로 다시 지정했다. 이렇게 함에는 전문가들까지도 지정번호를 마치 “문화적, 역사적, 심미적, 환경적 가치(cultural, historical, aesthetic, and environmental values)”로 계량화된 평가치(quantitative evaluation value)로 오해하는 소지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전문가를 위해 좀 어려운 말씀을 드리면, 인흥서원(仁興書院)의 명심보감 판본의 서지학적 특징(書誌學的 特徵)은 i) 판목수(板木數) 모두 33장이나 범례(凡例)와 목록(目錄) 판목이 각 1장씩 결락(缺落)되어 현재는 31장이다. ii) 판식(板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 테두리 두 줄)으로, 계선(界線, 상하로 줄 침)이 있다. iii) 1면에 10행 18자이다. iv) 안쪽으로 향하는 쌍엽화문어미(雙葉花紋魚尾)에다가 판심은 상하백구(上下白口)로 되어 있다. v) 마구리는 없는 것도 다수이다. vi) 책판의 크기는 가로 34.5㎝, 세로 22.3㎝이며 두께는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서책의 서지학적 특색으로 i) 편철에도 원칙이 있어 우리나라는 음양오행에 따른 오공철(五孔綴)에다가 붉은 명주실로 묶는다. 일본은 사공철(四孔綴)을 하고, 중국은 4~10의 짝수 구멍(偶數孔)으로 편철한다. ii) 한국은 특정판식(特定板式)이 있거나 목판본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어미(魚尾), 판심(版心) 등에 제목 등을 적고 있다. iii) 표지(表紙)는 회화나무꽃(槐花)으로 물들인다. 심지어 내지(內紙)까지도 황괴지(黃槐紙)를 사용한다. 해외고서귀중본 가운데 한국에서 만든 서책임을 알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서지학적인식표식(bibliographical recognition mark)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비근한 사례로 지난 2022년 5월 중국 감숙성(甘肅省) 난주대학교(蘭州大學校)에서 발간한 ‘실크로드, 인문과 예술(絲綢之路 人文與藝術, Huaminities and Art of The Silk Road)’에 아르메니아의 마테나다란(Maternadaran, Armenia) 고문서 박물관에 소장된 고문서(景賢錄下卷第一章)를 중국 목판(본)이라고 게재했다. 그런데 이 책(목판)이 바로 1719(숙종 45)년 구지 도동리 출신 김하석(金夏錫, 1638~1687)이 출간했던 도동서원(道東書院)의 경현속록하권(景賢續錄下卷) 1~2면과 그리고 20 ~21면이었다. 한국 서지학(書誌學)의 기초만 익혀도 쌍엽하문어미(雙葉花紋魚尾)만 보고도 달성 도동서원의 독특한 인식표임을 알 수 있었기에 일본 역사학자 미야 노리코(宮 紀子,ミヤノリコ) 교토대학 교수가 한국도서라고 신문에 게재했다.
글=김도상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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