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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눈치 보지 않고 달린 하루…장애인 가족의 ‘귀한 나들이’

“지오야, 총알처럼 뛰어나가지 말고 우리 천천히 같이 뛰는 거야. 꼭 함께 완주해 보자.”

“지오야, 총알처럼 뛰어나가지 말고 우리 천천히 같이 뛰는 거야. 꼭 함께 완주해 보자.”

9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 ‘제11회 슈퍼블루마라톤’ 출발선에 선 정지오(17) 군에게 어머니 엄지이(46) 씨가 말을 건넸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지오군 곁에는 아버지와 교회학교 교사도 함께 섰다. ‘삐’ 마라톤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평화의 광장이 파란 물결로 일렁였다. 그 순간 지오군이 템포를 조절하지 못하고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엄씨는 아들 곁을 바짝 쫓으며 “지오야, 천천히“라며 호흡을 가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지오군은 찬찬히 부모님, 그리고 러닝메이트 교회 선생님과 발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날 지오 군의 목표는 기록 단축이나 경쟁이 아니었다. 발걸음을 맞춰주는 러닝메이트들과 서로의 속도를 살피며 무사히 같은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엄씨는 “지난해 아들과 처음 참여했는데, 지오가 이 대회가 무척 즐거웠는지 주일 예배에 갈 때면 선생님과 함께 찍은 그날의 사진을 찾아보곤 했다”며 “올해도 아이와 ‘함께 완주’라는 목표를 안고 달려, 결승선에서 다 같이 기뻐하는 순간을 고대했다”고 말했다.

한글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걷고 달리며 편견의 벽을 허무는 ‘제11회 슈퍼블루마라톤’ 현장의 풍경이다. 스페셜올림픽코리아(SOK•박성근 회장 직무 대행)와 롯데가 공동 주최한 올해 11번째 대회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약 8000명이 참가해 열기를 띠었다.

한글날 맞이 ‘바른 말 쓰기’ 실천… 다름을 인정하는 달리기

올해는 특별히 한글날을 맞아 ‘한글날, 장애인에게 바른 말을 전해요’를 주제로 열렸다. 참가자들은 출발 전, 장애인을 존중하는 언어와 행동을 담은 다섯 가지 약속을 박수미 아나운서의 선창에 맞춰 한목소리로 외쳤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입니다

장애는 앓는 것이 아니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고 싶을 때는 상대방이 원하는지 먼저 물어보세요

발달장애인에게 반말을 하지 말아주세요

장애우가 아니라 장애인이라고 불러주세요.

출발선에서 외친 약속은 코스 위에서 실천으로 이어졌다. 상대방의 속도를 기다리고,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한 사람의 도전을 함께 응원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파란색 운동화 끈을 묶고 달렸다. 파란 끈은 장애인의 희망과 자립 의지,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상징한다.

대회는 비장애인이 뛰는 10km, 5km 코스가 먼저 출발한 뒤, 장애인과 가족의 안전한 참여를 위해 마련된 슈퍼블루 5km 및 1.6km 걷기 코스가 순차적으로 출발하며 배려 속에 진행됐다.

장애인 가족들에게 이날 행사는 마음 편히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귀한 나들이’였다. 하지만 코스에서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도 생겼다. 날아다니는 비둘기에 시선을 빼앗겨 달리던 길을 벗어나는 아이가 있었고, 갑작스러운 생리적 문제로 걸음을 멈춰야 할 때도 있었다. 부모와 교사들은 그때마다 아이의 상태를 살피며 다시 발걸음을 맞췄다. 이런 행동을 유별나게 바라보는 시선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들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자폐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이하진(10)양의 어머니 박혜진씨는 “발달장애 아이 특성상 상동행동이나 돌발행동이 있어 평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일반적인 사회·문화 활동에 참여하기 어렵다”며 “하지만 이 마라톤은 아이들의 독특한 행동이 나와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고 함께해 준다. 마음 졸이지 않고 오롯이 함께할 수 있는, 저희 같은 가족에게는 많지 않은 소중한 기회”라고 말했다.

이날의 동행은 부모가 홀로 감당하던 긴장을 나누는 일이기도 했다. 장애인 곁에는 1명당 3명의 러닝메이트가 동행했다. 이들은 보폭을 맞추고, 지칠 때 응원하고, 아이가 다시 움직일 때 함께 나아갔다. 장애가 있는 참가자를 일방적으로 돕는 봉사를 넘어 같은 목표를 향해 호흡을 맞추는 러닝메이트가 된 셈이다.

함께 달리고 밀어주며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시간

이날 마라톤 대회에는 양재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 사랑부(장애인사역본부) 소속 발달·정신적 장애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대거 참석해 축제에 온기를 더했다.

“하진아, 정말 잘한다. 잘할 수 있어.”

5㎞ 코스에 나선 최영란 교사는 뛰다가 걷기를 반복하는 자폐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하진(9)군에게 격려를 건넸다. 결승선까지 가는 동안 필요한 것은 재촉보다 격려였고, 할 수 있을지 미리 판단하기보다 함께 걸어보는 일이었다.

최 교사는 사랑부에서 18년간 교사로 섬겨온 그에게도 이날은 하진군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는 “평소 주일 예배 때 하진이는 주로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려 해서 속으로 ‘5km를 다 못 가고 돌아올 것’이라 지레짐작했다”며 “하지만 하진이는 달리기를 멈춘 뒤에도 걷기를 이어갔다.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끝까지 해내는 하진이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하진이의 힘을 발견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우혜진 사랑부 교사 역시 아이들이 갇혀 있지 않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우 교사는 “함께 달리고 밀어주며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시간”이라며 “성경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나 혼자만 잘살 수 없다. 고정화된 시선만 거두면 장애 아이들 역시 우리가 똑같이 돌보고 함께하는 이웃이자 자녀다. 이런 시선의 변화가 장애인 부모님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터운 지원 체계 호소… “혼자가 아닌 인생의 마라톤 완주하길”

마라톤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짊어지고 가야 할 현실적인 고민도 묻어났다. 엄씨는 “복지 정책이 예전보다 좋아져 부모의 사회 참여가 부분적으로 가능해졌지만, 이는 주로 경증 장애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어  “중증 장애인은 여전히 부모의 전적인 돌봄이 필수적이며, 학교 교육이 끝난 성인이 된 이후에는 갈 곳이 없어 집에서 돌봐야 하는 처지”라며 “중증 장애인도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더욱 세심하고 두툼한 지원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진양의 아버지 이진규씨 역시 “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는 이런 행사도 필요하고 장애 인식 교육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장애인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것이 전적인 가족들의 책임이 아닌 사회가 함께 지원해야 하는 사회 법 및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날 가족들이 바란 것은 아이가 낯선 시선을 걱정하지 않고 가을 풍경을 누리며, 곁에 있는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춰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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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양의 어머니는 그 바람을 ‘인생의 마라톤’에 빗댔다.

“슈퍼블루마라톤 시간 동안 가족이 함께 가을 날씨를 즐기고 예쁜 자연을 감상하며 마라톤에 임하듯, 인생의 마라톤에서도 앞만 보고 일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감사함으로 끝까지 완주하고 싶습니다. 교회 공동체, 친구들, 그리고 가족이 함께 손잡고 웃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시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장에는 SOK 앙상블의 축하 공연과 유명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무대, 양궁 체험존 등 풍성한 부대행사가 열렸으며, 완주자들에게는 한글 디자인이 새겨진 특별한 메달이 수여됐다.

나경원 SOK 명예회장은 “2013년 ‘바른 말 쓰기 블루 캠페인’으로 시작된 마라톤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겨 감회가 새롭다”면서도 “아직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벽은 높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편견의 벽을 낮추는 가교가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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