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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낮엔 기계앞, 밤엔 통제, 12시간 노동끝나도 자유없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 여성노동자들은 사실상 기계부속품처럼 취급됐다. 1936년 8월27일자 조선일보의 종연방적 임동공장 르포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새벽 5시30분이면 사이렌 소리에 전원 기상하고 6시30분부터 작업에 들어간다.

6. 여성노동자 공장 담장안의 삶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작업실 한증막

일과 끝나도 기숙사 생활도 고단

하루 12시간 일당 25전 밥갑 등 공제

도망 못가게 강제적으로 저축시켜

저임금에 환경 열악 도주도, 실패땐 고통따라

종연방적 임동방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군인과 같은 엄격한 통제로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기계 앞을 지켜야 했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공

종연방적 임동공장 여성노동자들은 사실상 기계부속품처럼 취급됐다. 1936년 8월27일자 조선일보의 종연방적 임동공장 르포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새벽 5시30분이면 사이렌 소리에 전원 기상하고 6시30분부터 작업에 들어간다. 점심시간은 30분이었지만 교대 과정에서 실제 주어진 시간은 15분 가량이었다. 공장에서 식당까지 오가는 데만 10분정도가 걸려 실상 밥먹는 시간은 고작 5분 남짓이다. 작업을 마치면 기숙사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밤9시면 전원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12시간 일했다. 공장과 기숙사를 오가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장성 출신 선오순 할머니는 지난 2020년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진행한 일제 강점기때 근무한 노동자 구술 채록에 참여한 8명 가운데 한명이다. “아침마다 여섯시면 운동장에서 국민체조하고 일본말로 고구신민노(황국신민서서)를 안하면 어디 못가요. 나는 열두살 먹었어도 그거 그안에서 배워서 알았어. 못 외운 사람은 두들겨 맞고 울고. 그래갖고 한달 훈련받고 이리저리 베짜는데 등 나눠 갔지.”

소녀들이 매일 마주해야 했던 공정은 한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솜을타는 곳부터 실을 만들고 감는곳, 베를 날고 매는 곳, 베를 짜는 곳, 광목을 손질하는 곳까지 작업장은 여러 공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방적기는 쉴새없이 돌아갔다. 소음과 열기, 솜먼지가 뒤섞인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계앞을 지켜야 했다.

종방 임동방직공장에서 한가로이 그네뛰기를 하는 여성 노동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공장 안내서에 수록된 이 사진은 여공을 모집할때 신문에 실려 사용됐다. 실제 여성노동자들의 공장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간 조업일수는 331일이었다. 한달에 3차례 가량 휴일이 있었지만 사실상 일년내내 기계곁을 떠나기 어려웠다. 특히 작업장 구조와 기계높이는 어른 키에 맞춰져 있어 어린 소녀들은 각종 사고 위험에 노출됐다.

철야 노동 중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노동자가 쉴새없이 돌아가는 방적기계에 손가락을 다치거나 신체 일부가 빨려들어가는 산업재해도 잇따랐다.

작업 환경 역시 열악했다. 공장 안에는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솜먼지가 눈처럼 자욱하게 날렸다. 방진 마스크조차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진폐증, 폐결핵, 기관지염 등으로 시달렸다. 치명적 직업병에 걸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적실은 섭씨 30도 이상의 고온과 80% 이상의 높은 습도를 유지했다. 창문까지 굳게 닫힌 작업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땀띠와 피부병을 달고 살았다. 생산효율을 위한 환경이 노동자의 건강보다 앞섰던 셈이다.

영양상태도 좋지 않았다. 늑막염, 장티푸스 등 각종 질병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근하면 임금이 깎였기 때문에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

회사는 병든 노동자들을 귀향시키기보다 공장안에 마련된 병원에 입원시켰다. 치료를 위한 조치이기도 했으나, 공장 내부의 열악한 사정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에 내부에 설립된 병원.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간 기숙사 역시 휴식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숙사 생활은 사실상 의무였다. 생활자 대부분은 전남 각지에서 올라온 10대 소녀들이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부모의 손을 잡고 왔거나 모집책을 따라 공장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좁은 다다미방에 12~20명이 생활했다. 한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이불 한 채를 펼칠 정도에 불과했다. 창문은 작고 환기시설도 열악해 기관지 천식, 옴 등 피부병을 앓는 노동자도 많았다. 식사도 고된 노동을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콩깻묵을 섞은 거친 밥과 멀건 소금국이 주로 제공됐다.

박근남 할머니는 당시 식사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누런 플라스틱 그릇에 밥을 주는데 두숟가락 먹으면 없어요. 날이 좋은 쉬는 날에 동료들과 냉이 등을 뽑아 먹기도 했지.”

기숙사의 규율은 군대식이었다. 일제 취침과 점호가 이뤄졌고 생활 전반을 관리자가 통제했다. 결석과 도주를 막고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관리 방식이었다.

외출하려면 구체적인 사유를 밝혀야 했다. 같은 방을 쓰던 동료가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으면 나머지 노동자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었다. 공장에는 전직 총독부 형사 출신이 배치돼 노동자들의 필적조사를 했다. 공장과 기숙사 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편지 검열이 이뤄지기도 했다.

구술 채록에 참여한 윤수덕 할머니의 증언에는 당시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방마다 사람이 나가고 없으면 관리하는 사람이 당해. 밤에 여수고 그라지. 공장 둘레 울타리가 철망으로 다 둘러쌓여 있어 나갈 수가 없어. 방마다 놔둔 그 사람이 다 관리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관리했제.”

작업 도중 불량품이 나오면 구타가 기숙사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공부를 시켜준다고 말을 믿고 공장에 들어온 소녀들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배움이 아니라 혹독한 노동과 폭력이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여성 노동자 기숙사.

일과를 마친 뒤 기숙사조차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공장 담장 안의 하루 전체가 회사의 관리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인적 노동에 대가는 제대로 지급됐을까? 1936년 조선일보보도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25전을 받았다. 1년 이상 근무해 숙련노동자로 인정받으면 하루 27전을 받았다. 이때 1전은 1930년대 주요 물가 체감지표에 따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며 약 300~600원 수준이다. 1930년 설렁탕 한 그릇이 10전(현재 체감 1만원), 전차 삯이 10전(현재 체감 1천500원)이었다. 가장 많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일당은 하루 43전이었다.

그러나 종연방적 임동공장 종업원 2천명 가운데 이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6명뿐이었다. 받은 임금을 모두 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루 식비로 15전이 빠져 나갔고 작업 중 불량품이 발생하면 그 값이 월급에서 공제됐다.

취업 당시 부모가 미리 받은 광목 전대금도 갚아야 했다. 광목 10마는 가난한 농촌 가정에 적지않은 유인책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노동자를 공장에 묶어두는 사실상의 부채로 작용했다.

도주를 막는다는 명목의 강제 저축도 있었다. 임금의 3분의 2 이상을 저축해야 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퇴사할 때까지 돈을 찾기 어려웠다.

하루 12시간의 노동에도 실제 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같은 노동 환경은 낮은 출근율과 높은 이직률로 이어졌다. 3년 계약으로 입사한 여성 노동자들의 초장기 평균 근속률은 3.5개월 수준이었다.

공장 가동 이듬해인 1936년 4월 초 종연방적 임동공장이 일본 본사에 보낸 공문에서도 낮은 출근율과 높은 이직률은 주요 문제로 지적됐다.

그러나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자유롭게 공장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숙련공이라는 퇴사를 막거나 계속 근무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성노동자들의 욕실.

견디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선택은 공장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낮은 임금과 비인격적 대우를 견디지 못해 담장을 넘거나 하수구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는 일이 한 달에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하지만 공장을 둘러싼 3~4m 높이의 담장을 넘어 빠져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도주하다 붙잡힌 노동자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펴낸 임동방직공장 구술자료에는 도망치다 붙잡혀온 소녀 노동자들을 사무실을 무릎 꿇린 채 심하게 때리고 다시는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머리카락 가운데 일부만 남겨놓고 깎았다는 증언이 담겨있다.

무등일보가 지난 2025년 4월 장흥에서 직접만난 한순임 할머니 역시 같은 기억을 전했다.

회사의 강압적인 통제에도 탈출은 이어졌다. 일제 말기에는 하수구를 통해 공장을 빠져 나가던 여성이 공장에서 흘러나온 삼을 삶은 뜨거운물로 인해 숨지는 일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노동환경이 더욱 가혹해졌다. 미국산 면화공급이 어려워지면서 대마 혼방이 늘었고 삼을 삶고 씻는 작업이 많아지면서 노동자들의 신체적 고통도 커졌다.

최점덕 할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삼 삶는데서 일한 사람들은 손이고 발이고 능글능글해. 독해서. 작두에서 삼 썬거 삶아가지고 오믄 그놈을 다시 씻어야제. 목욕탕같이 아주 마당만큼 넓은 곳 퍼부어놓으면 그놈 건져서 씻느라 손발이 능글능글해, 독해서. 삼 씻을려면 잿물이 들어가야 되거든.”

공장 담장 안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기계가 돌아가는 낮에는 노동을 견뎌야 했고 기숙사로 돌아간 밤에는 감시와 통제를 버텨야 했다. 공장은 일터이면서 동시에 생활공간이었고 담장은 노동자들의 일상과 외부 세계를 가르는 경계였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그렇게 공장 담장 안에 갇혀 있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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