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110弗 재진입에 수급 비상
생산서 운송·보관·비축·양도까지
공급망 전과정 정부가 직접 관리
日수출규제 당시 소부장법에 신설
매머드급 충격 가능성에 선제대응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한 9일 전남 여수시 석유화학단지 공장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를 비롯한 주요 유화 제품들을 대상으로 긴급 수급 안정 조치를 단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의 비축 원유가 4월부터 소진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원유를 정제한 나프타와 여기서 파생하는 각종 플라스틱·비닐까지 우리나라 공급망 전반에 병목 경고등이 켜지면서다. 반도체 공정에 반드시 필요한 헬륨 등 일부 핵심 소재에 대한 공급난 우려도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19일 산업통상부와 재정경제부 등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 및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에 규정된 ‘긴급 수급 안정화를 위한 조정(수급 안정화 조정)’을 발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조치는 국제 통상 여건의 급변 등으로 산업 공급망의 원활한 기능에 지장이 초래되고 국민 경제활동이 현저하게 저해될 우려가 있을 경우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다. 국무회의를 통해 이 조치가 의결되면 나프타와 같은 지정 품목의 생산 계획을 정부가 수립 또는 변경할 수 있다. 공급 우선순위 역시 정부가 임의로 조정할 수 있고 운송 및 보관·비축·양도까지 지시할 수 있다. 공급망을 단기간에 안정시킬 수 있는 초강력 조치인 셈이다.
수급 안정화 조정은 2019년 말 소부장특별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신설됐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핵심 품목 수출규제로 국내 제조업이 위기에 처하자 통상 여건 급변 시 공급망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정부가 수급 안정화 조정 카드를 꺼낼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마스크 대란이 벌어지고 2021년 요소수 품귀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정부는 생산 및 공급·유통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긴급 수급 조정 조치’를 단행했지만 이는 물가안정법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대란은 물류·운송, 마스크 가격 등으로 파장이 제한적이었던 만큼 소부장특별법이 아닌 물가안정법을 통해 이뤄졌던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수급 안정화 조치는 일종의 긴급 명령권”이라며 “석유화학 소재들은 제조업 분야의 기초인 만큼 중동 사태가 수급 불균형이나 가격 인상으로 번지지 않도록 법상 모든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 최고가격제로 시장 불안을 잠재운 것처럼 필요하다면 과감한 조치를 빠르게 실행한다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원유 수급 위기가 이전과는 다른 매머드급 충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분위기다. 원유를 정제해 만드는 나프타와 나프타를 가공해 만드는 에틸렌은 조선·자동차부터 옷, 비닐봉지, 페트병, 플라스틱 용기 등 산업 전반에 쓰이는 원료이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도 공급망 병목이 단순히 석유화학 기업의 문제를 넘어 제조업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석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A 기업은 이달 1일 ABS와 SAN 가격을 톤당 10만 원 인상한 데 이어 지난주에는 톤당 40만 원을 추가로 인상하겠다고 납품 업체들에 통보했다. ABS와 SAN은 플라스틱의 일종으로 자동차 내장재나 화장품 용기, 주방용품 등에 쓰이는 석유화학제품이다. B 기업은 이달 초 비닐봉지에 쓰이는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 각종 용기에 쓰이는 폴리프로필렌(PP) 등 석유화학제품 가격을 톤당 20만 원 올렸다. C 기업은 최근 “3월 9일 이후 접수되는 주문 건부터는 3월 말에 최종 확정되는 가격으로 거래를 진행하겠다”고 고객사들에 공지했다.
산업연구원은 이날 보고서를 통해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장기화하고 국제유가가 150~180달러로 치솟을 경우 국내 제조업 생산 비용이 평균 11.8% 상승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잇따른 시장 개입 조치가 시장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제조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휘발유·경유·등유에 대해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면서 정유 업계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고가격제 적용 대상이 아닌 나프타 가격을 올릴 유인도 발생했다”며 “정부의 시장 개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픽코노미
댓글
0